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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라톤 Apr 15. 2021

주의 얼굴을 마주 볼 때까지

출 34:29-35

초라한 우리 각각의 인생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생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토록 초라하고 우울한

내 삶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모세는 첫 돌판을 받아서 내려왔을 때,

금송아지를 둘러싸고 울부짖는 그의 백성들의

모습에 분노하여 돌판을 깨부순다.


자신의 혈기와 분노를 이기지 못한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한다.


빛난 하나님의 영광이 얼굴, 피부에서 뿜어져 나와

사람들이 다가오지도 못하지만 정작 모세는 그 영광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다가오고 본인의 모습을 인지하고 난 후 혹시 영광이 사라지고 또 본인의 옛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사람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다


오직 여호와 앞에 수건을 거두고

그의 얼굴을 보며 말씀을 받는다.

목동들은 하나님의 얼굴, 아기예수의 얼굴을 비라보고 기뻐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7-18절에서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자 수건을 썼다고 말한다.


적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고, 그것을 따르면

좁지만 생명의 길임을 안다.


그러나 그 길을 선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나 현실의 장벽이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인도하심을 받아야지.”라고 도전하지만 곧 포기한다.


그리고 차라리 수건을 집어 든다.


현실의 장벽과 예전의 내 모습,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린 수건을 걸쳐서 하나님의 모습이 부질없는 내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막고자 한다.

보리싹이 음트는 시간, 씨앗의 껍질은 깨진다.

아무리 현실의 장벽이 막고 있더라도,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던 기독인 아닌가?


그토록 갈급하게 헤매던 진리와 영광의 광채를 왜

나의 인생에 적용하고 드러내는 일이 어려운 것일까?


두려움 때문이다.


영광의 옷을 입기 위해 예배(제사)하지만

옷 입고 살아가는 삶(순종)은 다른 차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과격하게.


다이내믹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과거의 나를 버리게 한다. 씨앗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리고 선택해야 한다.

모세도 다르지 않았다.


그냥 지나가버리면 그만이었을 불타는 떨기나무를 흘깃 본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이켜가서   광경(말이  되는데?) 보리라”(출애굽기 3 2-3)


이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거친 들판에서 발견한 깨진 도토리 껍질에 생명이 담긴다.

울타리로 산책하기 좋은 둘레길로 목적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친 비탈길로 걸어가게 한다.


그곳에서 누구도 맛보지 못한

아름다움과 깨끗한 산바람을 맛보지만,

어둠이 찾아오고 들짐승들이 울어대면

허둥지둥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곳.


오직 내발의 등, 내 길의 빛인 절대자의 인도하는 곳으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절박감에 우린 무기력해진다.


우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나의 권리와 경험과 과거를 모두 내려놓고

항복한다.


현실의 벽, 시선의 벽, 경험의 벽이 무너진다.

살아야 하니까.


내 얼굴을 가리고 오직 그의 얼굴만을 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순종한다.


툭, 씨앗의 껍질이 깨지고 그릇이 된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은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의 길을 살아내는 일이다.

항복 없이 불가능하다.


모세가 가렸던 수건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벗기시며 말씀하신다.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된다.”

“네가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띄고 다녔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두 팔을 벌리리니 남(성령)이 너를  띄우고 (바람이 불듯) 너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게  것이다.”(요한복음 21장 18절)


나의 얼굴을 이제 보라. 나다.

포기하지 말자. 내가 세상을 이긴 것처럼 너도 나와 함께라면   있다.”


주의 얼굴을 마주 볼 때까지,

인생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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