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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폴로 Dec 02. 2022

도시의 영혼을 사수하라

페더레이션 광장. 나오며.

대부분의 서구 도시에는 있지만 멜버른에는 오랫동안 없었던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광장이다. 멜버른의 랜드마크 건축물 중 하나인 플린더스 역 맞은편에 위치한 페더레이션 광장(Federation Square). 긴 단어를 줄여 애칭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호주 사람들은 이곳을 ‘Fed Square’라고 부른다. 멜버니언들에게 이 광장은 ‘도시의 영혼 (civic soul)'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거창하게 ‘영혼’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큼 이 광장이 멜버니언에게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50년간 멜버른에는 도시를 대표할 만한 광장이 없었다. 공공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시민들이 만나고 소통하며, 때로는 여유를 즐기고, 모두 함께 도시의 이벤트를 축하하거나 기념하고, 사회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도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멜버니언들은 오랫동안 이런 광장이 만들어지기를 소망해왔고 그렇게 만들어질 광장은 모든 시민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광장’하면 떠올리는 유럽의 넓은 광장들과 비교해보자면 페더레이션 광장은 그 생김새부터 다르다. 되려 관광객 입장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처음에 이곳을 방문했을 땐 ‘여기가 광장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야가 확 트인 넓은 공간도 아닐뿐더러 전체적인 색깔과 분위기도 우중충했다(겨울엔 특히 더 그렇다). 전반적으로 무채색 계열의 바닥과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멜버니언들이 좋아하는 잔디나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늘도 찾기 어려워 여름에는 방문하기가 꺼려진다.

그림1. 위에서 내려다본 페더레이션 광장(2007년). 가운데 공터가 이벤트나, 집회 등이 이루어지는 Civic square라 불리는 공간(사진저작권:AussieNickuss)


그런데 이 광장을 거닐다 보면 어딘가 묘하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이 광장이 호주의 자연환경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페더레이션 광장은 호주의 연방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1996년 국제 디자인 공모에서 당선된 런던의 랩 아키텍처(Lab Architecture)가 호주의 베이츠 스마트 아키텍츠(Bates Smart Architects)와 공동으로 조성한 페더레이션 광장은 호주 원주민들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다소 난해한 건축 언어로 풀어놓았다. 그렇다 보니 이 광장이 처음부터 멜버니언들의 애정을 받는 곳은 아니었다. 2002년 준공 당시 그 외관이 마치 ‘디자이너들이 버린 짐짝들을 쌓아 놓은 큰 무더기’라고 묘사될 정도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겨울에 쉼터가 되어 줄 공간도 적고 여름에 그늘도 제공해주지 못한다. 건축물의 외관은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하기보다는 마른 가뭄이 든 채석장 같다는 혹평도 들었다.

그림2. 미술관 쪽에서 바라본 페더레이션 광장. 저 멀리 플린더스 역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호주 스타일의 광장은 자연스럽게 멜버니언들의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또한 페더레이션 광장은 멜버니언들에게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며 시민들과 소통해왔다. 광장 뒤쪽으로는 상설 현대미술관과 원주민 예술 센터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일 년 내내 다양한 사회 문화 행사들이 열리는 장으로서 활발히 기능하고 있다.

그림3. 페더레이션 광장 잔디에 앉아 호주오픈 테니스 경기를 스크린으로 관람하고 있는 사람들 (사진 출처 : visitvictoria.com)
그림4. 페더레이션 광장에서 원주민 Tanderrum 의식을 관람 중인 사람들 (사진출처 : visitvictoria.com)


2018년 페더레이션 광장은 그 '영혼'을 잃을 뻔한 일을 겪었다. 빅토리아 주 정부가 재정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페더레이션 광장을 수익을 나는 구조를 만들고자 애플 플래그쉽 스토어의 입점을 허가하고, 그를 위해 기존 광장 건축물의 일부를 철거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정부의 목적은 애플스토어를 통해 저조한 방문객 수를 늘리고 재정 적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림5. 애플사의 페더레이션 광장 내 애플 플래그십 스토어 디자인 초안


언론, 학계, 전문가 그룹, 시민들은 이러한 정부의 계획이 페더레이션 광장이 가진 공공적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 즉각적으로 비판하며, 광장이 과도한 상업성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정부의 계획 발표에 대응하여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호주 내셔널 트러스트 빅토리아주 지부에서 페더레이션 광장을 보호가 필요한 목록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이 지정을 위해 역사와 문화유산 전문가 그룹과 페더레이션 광장 보존을 위한 운동 단체인 ‘Our City, Our Square’가 관련 정보를 제공하였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비정부기구로 이 기구의 지정 자체가 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나, 관련 전문가 그룹과 시민단체들을 움직이게 하는 시발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빅토리아주의 문화유산 주무관청인 헤리티지 빅토리아(Heritage Victoria)로 하여금 페더레이션 광장에 대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평가를 실시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2018년 말까지 페더레이션 광장에 대한 임시적 보호조치가 시행되었다. 즉, 헤리티지 빅토리아로부터의 허가 없이 페더레이션 광장에 대해 어떠한 변경도 일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헤리티지 빅토리아가 이 광장을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림6. Our City, Our Square 홈페이지의 애플사를 비난하며 행동을 촉구하는 그림(출처 : ourtcityoursquare.org)


헤리티지 빅토리아는 독립기구인 문화유산 위원회(Heritage Council)에게 페더레이션 광장을 문화유산목록에 등재할 것을 권장하였다. 문화유산 위원회는 주민의견 청취를 시작하였다. 2018년 말까지 시간을 벌게 된 멜버니언들은 ‘도시의 영혼’을 사수하기 위해 이 광장을 빅토리아주 문화유산으로서 등록하기 위해 집단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문화유산이 되려면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들을 거쳐야 하며, 거기에는 지역주민 의견조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기 위해 가장 큰 난관은 준공된 지 겨우 17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공간을 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기존 사례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니 만큼 힘겨운 과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거나 등재되려면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기 위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참고로 한국의 문화재보호법 상 근대문화재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빅토리아주에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의 세대가 지나야 한다는 원칙이 존재한다.     


멜버니언들은 기존 원칙을 뒤집기 위해 적극적인 서명운동과 대규모 시위를 펼쳤다. 전문가들도 힘을 보탰다. 로열 역사학회(Royal Historical Society)는 페더레이션 광장이 한 세대 내에 이미 “멜버른의 삶의 구조(fabric of Melbourne Life)에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문화유산위원회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들의 노력이 성공한 것이다. 2019년 8월, 18개월이라는 기나긴 논의와 절차 끝에 페더레이션 광장이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고, 마침내 페더레이션 광장에 포함된 약 2,500가지의 풍경(landscapes), 조경, 건물, 기념물, 예술품 등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림7. 페더레이션 광장에 애플스토어 입점을 반대하는 시위(사진 저작권 : Chris Hopkins)


그 사이 애플사는 수정된 설계안을 가져왔지만 그것 역시 반대에 부딪혔고 2019년 4월 자신들의 광장 입점 계획을 폐기했다. 애플사 입장에서도 굳이 멜버니언들에게 비난과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그곳에 입점하는 것이 회사 이미지에 결코 좋지 않다고 판단했을 터이다. 아마도 눈치 빠른 애플사는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결코 참지 않고,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끈질기게 행동하는 멜버니언들의 기질에 질려버린 것이 아닐까.


멜버른의 영혼을 사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멜버른은 든든할테다.


참고 문헌


1. (기사) For what shall it profit a city if it loses its civic soul? A plea to preserve Melbourne’s Fed Square (2018.2.20, The Conversation, https://theconversation.com/for-what-shall-it-profit-a-city-if-it-loses-its-civic-soul-a-plea-to-preserve-melbournes-fed-square-92099)

2. (기사) Federation Square gets temporary heritage protection from Apple store(2018.8.23. The Age. https://www.theage.com.au/melbourne-news/federation-square-gets-temporary-heritage-protection-from-apple-store-20180823-p4zz70.html)

3. (기사) Fed Square added to state's heritage register just 17 years after opening (2019.8.26. The Age. https://www.theage.com.au/politics/victoria/fed-square-added-to-state-s-heritage-register-just-17-years-after-opening-20190826-p52kxv.html)

4. (기사) How can a 17-year-old place gain heritage status? What this means for Melbourne’s Fed Square (2019.8.27, The Conversation, https://theconversation.com/how-can-a-17-year-old-place-gain-heritage-status-what-this-means-for-melbournes-fed-square-122455)

5. (도서) Melbourne: A History of New (Maree Coote,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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