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킬다 비치(St. Kilda Beach)
세인트 킬다(St. Kilda)는 멜버른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을 가진 지역 중 하나다. 멜버른 방문객이라면 대부분 이 해변을 들어보았거나 방문한다. 세인트 킬다 해변은 CBD에서 트램을 타고 남쪽으로 2-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해변뿐만 아니라 해안을 따라 야자수가 심어져 있는 공원, 그 사이사이 위치한 크고 작은 카페, 베이커리, 바, 공연장, 서점 등이 어우러져 주말마다 붐빈다. 오랜 기간 멜버니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장소다.
개인적으로 꼽는 이곳의 명물은 이곳에 서식하는 귀여운 야생 펭귄들이다. 도시 해변 바위 사이사이에 펭귄이 살고 있다니. 바위틈에서 꿈틀거리는 자그마한 펭귄들을 발견하는 그 생경한 경험은 잊기 힘들다.
세인트 킬다 지역의 또 다른 명물은 놀이동산인 루나 파크(Luna Park)다. 1912년 개장한 이래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운영되고 있는 유서 깊은 놀이동산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필립스 형제들과 제임스 딕슨 윌리엄스가 개발한 이 놀이동산은 빅토리아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보호되고 있다.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처럼 빠르고 재미있는 최첨단(?) 놀이기구들은 없고 규모도 작지만, 나무로 만들어진 ‘시닉 레일웨이’를 타면서 아름다운 세인트 킬다 해변 풍경을 볼 수 있는 소소한 낭만이 있는 곳이다.
루나 파크를 개발한 설립 멤버 중 윌리엄스는 1913년쯤 미국으로 돌아가고, 남아있던 필립스 형제들은 루나 파크의 길 건너편에 있던 삼각형 모양의 땅에 문화 시설들을 건립하기로 한다. 1913년 ‘팔레 드 댄스’라는 댄스홀이 개관했고(수차례 증개축을 거쳤으나 200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옆에 1927년 팔레 극장도 개관을 했다. 팔레 극장도 루나 파크와 마찬가지로 빅토리아주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팔레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뿐만 아니라, 라이브 공연장, 발레와 오페라 공연장으로 사용되며 20세기 호주 대중문화의 주요한 장소로서 지속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 편의 주인공은 해변도 놀이공원도 팔레 극장도 아닌, 팔레 극장 옆 삼각형 모양의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주차장 부지(이하 ‘삼각형 부지’)이다. 다른 글들에서 땅의 수호자들, 도시의 영혼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이 삼각형 부지를 세인트 킬다의 ‘심장’이라고 주장하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원래 습지였던 세인트 킬다 지역은 유럽인들의 멜버른 정착 이후 여가를 위한 공간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1857년 CBD와 철도로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 되었고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1891년 트램 라인이 건설되면서 세인트 킬다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자 정부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곳을 지중해 스타일의 리조트로 개발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세인트 킬다 해변을 따라 아름다운 정원을 설계하고 시계탑, 수영장 등을 건설했다.
이 삼각형 부지도 처음부터 주차장 용도로 쓰였던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그곳에는 댄스홀들, 식당, 소형 놀이기구, 오락실 등이 유흥 시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대표적인 멜버니언들의 여가 공간이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와 전쟁을 피해 동유럽으로부터 이주해 온 수 천명의 유대인을 비롯한 이민자들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택한 것이다. (지금도 이 동네를 걷다 보면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베이커리, 정육점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의 정착을 시작으로, 이 동네의 저렴한 집값과 생활비는 이 도시에서 소위 ‘주류’그룹에 안착하지 못한 이민자, 예술가, 히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불러들였다. 그러한 환경 속에 세인트 킬다 지역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멜버른의 대중문화와 대안적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을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멜버른이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CBD와 인접한 곳에 위치한 세인트 킬다도 개발 압력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투기 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거주민들은 젠트리피케이션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 사이 삼각형 부지에 위치했던 팔레 극장을 포함한 소수 건물을 제외한 건물들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공간은 주차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공간의 활용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2003년 세인트 킬다를 관할하는 지역 정부는 이곳에 일부 상점들이 입점시킬 계획을 발표하면서도 절대 ‘쇼핑센터’로 개발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이란 상황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2003년 이후 2008년까지 5년간 지역 개발 압력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개발 대상 부지는 넓어지고 투입될 개발 자본의 규모도 커져갔다. 특히, 2007년 팔레 극장 바로 옆 팔레스(Palace)라고 불리던 건물까지 화재로 소실되면서 시정부는 팔레 극장에 대한 보수 계획과 함께 정부 소유의 삼각형 부지에 대한 재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재개발이 항상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주차장 부지가 흥미롭고 혁신적인 공공 공간으로서 재개발된다면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쇠락해져 가던 팔레 극장도 시대에 맞게 재단장하여 새롭게 부상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또한 보행자들이 세인트 킬다 해변으로 더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을 변경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현재 팔레 극장과 해변 사이에 왕복 4차선 고속화 도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공 부지에 대한 개발이 민간 자본이 주도하는 대규모 개발이라는 점이었다.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적정 규모의 시설로 개발될 거라 약속했던 지역 정부와 주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부지 임대권과 재개발권을 따낸 Citta Property Group은 대규모 쇼핑센터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이 개발회사는 쇼핑센터 내에 멜버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슈퍼마켓, 약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나이트클럽과 술집, 2300명 수용 규모의 식당과 카페 등 150개의 상점을 입점시키고, 1200개의 지상 및 지하 주차 공간을 가진 호텔과 컨벤션 공간으로 개발할 계획을 수립했다.
이렇게 Citta Property Group이 주민들의 기대와 다른 계획을 발표하게 된 배경에는 빅토리아주 정부의 탓도 있었다. 주 정부는 자신들이 소유한 문화유산인 팔레 극장의 보수 비용을 민간 개발업자들에게 부과하였고 개발 부지에 대한 오염 제거에 드는 비용 또한 민간에서 부담하도록 조건을 달았다. 개발업체 측은 최대한의 개발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삼각형 부지를 엄청난 규모의 상업시설로 개발하여,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들인 비용을 지역 주민들에게 전가하고자 하였다.
이 재개발 계획에 찬성했던 주민들은 이 프로젝트가 지역 사회에 긍정적이고 경이로운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라 찬탄한 반면, 어떤 이들은 이 계획이 너무 크고 흉물스럽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지역주민들 간, 또 지역의회와 반대파 주민들 간 치열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일명 ‘Triangle Wars(삼각형 땅을 둘러싼 전쟁)’이다. (이 재개발 갈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도 동일하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반대파 주민들은 시의회 의원들이 Citta Property Group에서 제출한 허가신청서를 반려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시위를 진행하고, 6천 명의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시위에 참가한 주민들은 “세인트 킬다의 심장을 부수지 마세요(Don’t break St Kilda’s heart!)”를 외쳤다.
재개발 계획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핵심 논점은 이 개발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개발계획에 따르면 이 재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약 6억 달러의 자본이 지역 경제에 투입되어 2,600개의 일자리를 만들어지고 관광 명소들로 재탄생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으로는 반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없었다.
이 계획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이러한 대규모 개발이 기존에 탁 트여있던 세인트 킬다 해변 쪽으로의 경관을 가로막게 될 것을 특히 우려하였다. 이 재개발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쇼핑센터 상층부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유료로 이용하는 고객들이 아니고서는 해변의 경관을 마음껏 누릴 수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모두가 함께 누리던 경관이 재개발로 인해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만 누리게 되는 소비재로 전락한다면 그곳은 공공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라 보았다.
결국 이 반대 시위는 성공했고, 2009년 지역 정부는 개발사 측에 손해배상을 해주면서까지 이 재개발 계획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그 이후 2010년부터 약 3년간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재개발 방향성을 재정립한다. 그리고 2016년 지역 정부는 새로운 비전을 담은 마스터플랜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의 골자는 삼각형 부지에 새로운 공공 공간들을 만들고,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 시설을 중심으로 개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스터플랜이 나온지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빅토리아 주 정부와 민간 투자자로부터 투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여전히 주차장으로 사용 중이다.)
‘삼각형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로지 존스 감독은 이 반대 시위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이전에도 유사한 사례들에서 엄청난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개발이 저지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사안의 경우 빅토리아주 정부는 삼각형 부지에 대한 개발 권한을 지역 의회에 위임한 상황이었고 지역 의회는 개발을 추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과 다르게 세인트 킬다 지역의 반대 시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존스 감독은 “주변 환경과 연계되며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간을 자신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마음속 깊은 열망“이라고 설명했다.
“이 시위의 핵심은 장소에 대한 열정(a passion for place)이다. 단순한 말이나 논리가 아니라, 빛, 공기, 바다와 해안가에 세워진 돌로 쌓은 벽, 역사와 덧없음의 공간에 대한 경험이다. 이는, 때로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음에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개성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상호작용하는 숭고한 단계이다.”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서 공공성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소망과 그 공간이 지역사회에 가져다 줄 경험적, 문화적 가치를 상업적 가치보다 중요시 여기는 마음들이 이 삼각형 부지가 대규모 쇼핑센터로 변신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던 성공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참고 기사 및 자료
1. https://www.theage.com.au/national/battle-is-about-much-more-than-just-st-kilda-20080122-ge6mrl.html (Helen Halliday, The Age, 2008.1.22.)
2. https://www.smh.com.au/entertainment/movies/threesided-plot-development-20110929-1kytz.html (Jim Schembri. The Sydney Morning Herald, 2011.9.30.)
3. https://www.urban.com.au/expert-insights/buying/st-kilda-triangle-site-the-missing-link (Chris Peska, Urban.com.au)
4. https://antidotefilms.com.au/wp-content/uploads/2016/12/Study-Guide-4428-The-Triangle-Wars.pdf (일부 사진 및 감독말 출처)
5. https://www.portphillip.vic.gov.au/about-the-council/projects-and-works/st-kilda-trian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