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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폴로 Dec 21. 2022

폐쇄된 두 감옥의 서로 다른 운명

멜버른 감옥 vs 펜트리지 감옥

수업이 끝난 금요일 저녁, 밥은 먹어야겠는데 요리할 기운은 없어서 결국 배달앱을 켰다. 오늘은 뭘 먹어야 하나 한참 배달앱을 뒤적이다가 집 근처에 '페리카나' 치킨집이 개업한 걸 발견했다. '엇? 설마 내가 아는 그 페리카나 치킨인가?' 싶어 로고 이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맞는 것도 같다. 배달비도 아낄 겸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치킨을 사러 갔다. (한국도 요즘은 배달비가 별도로 부과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멜버른도 배달비가 거리에 따라 가까우면 5천 원부터, 멀면 만원을 넘기는 경우도 많다.)


진짜 내가 아는 그 페리카나가 맞다. 심지어 가게 안쪽에는 한국어로 페리카나라고 쓰여 있다. 외국 나오면 애국자 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유독 이 집이 이 건물 다른 식당들에 비해 붐빈다는 사실에 내가 치킨집 사장님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사실 한국치킨이 멜버른에서 유명해진지는 이미 오래다. 멜버른 시내 중심가나 아니라 다른 주요 쇼핑센터에서도 한국 치킨집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한국 치킨의 맛에 빠진 마니아들은 ‘ KFC’를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이 아니라 ‘코리안 프라이드치킨’이라고 부를 정도.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에 칠리소스를 포장 주문했다. 20분 정도 걸린다는 중국인 종업원의 말에 계산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카운터를 응시하다가 속으로 ‘대박!’을 외쳤다. 계산대 위쪽 영상 광고판에 박보검 배우가 나온다. 뒤늦게 응답하라 1988에 빠져 박보검 배우를 좋아하고 있을 때라, 박보검과 이동휘 배우가 나오는 치킨광고 메이킹 필름을 넋 놓고 구경했다.

그림1. 박보검 배우 광고 사진. 죄짓는 것도 아닌데 종업원이 쳐다볼까 부끄러워서 몰래 찍느라 한 장 밖에 못찍었다.


주문한 치킨이 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해서, 바깥공기나 좀 쐴까 싶어 밖으로 나왔다. 나는 멜버른의 여름을 좋아한다. 낮에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햇살이 뜨겁다가도 저녁이 되면 선선해지는 반전 있는 날씨가 맘에 든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즐기려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닌가 보다. 치킨집 맞은편 놀이터에는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이 그네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놀이터 옆 잔디밭 벤치에는 아마도 바쁜 업무에서 막 해방된 직장인이 고단한 한 주를 달래 줄 저녁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런데 놀이터와 잔디밭 사이에 광장이라고 하기엔 좀 작지만 그렇다고 광장이 아니라고 하기엔 엄청 작지도 않은 빈 공간에 웬 비석 같은 게 서 있다. 뭔가 싶어 다가가 살펴봤더니, 오래된 사진과 함께 이 공간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그 내용인 즉슨, 지금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지난 약 150년간 감옥이 있었던 부지였고 여기 이 광장 같은 공간은 그 수감자들이 노역을 하기 전후에 집결을 하던 장소라는 것이다.

그림2. 구 수감자 집결 장소, 현재는 광장(piazza). 가운데 서있는 안내판, 뒤로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들.


어쩐지 아까 치킨집을 찾아 들어올 때, 마치 중세의 성 같이 생긴 문을 지나왔는데 그럼 그게 감옥 건물이었다는 건가? 그런데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치킨가게가 입점해 있는 건물은 분명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새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싶어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니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 뒤쪽 벽돌로 된 건물이 연식도 오래돼 보이고 창문 창살 모양도 심상치가 않다. 잔디밭 뒤쪽으로도, 그리고 이 치킨가게가 입점된 새로 지은 건물 뒤쪽으로도 꽤 오래돼 보이는 벽돌 담장이 보인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 페리카나 치킨집이 옛 감옥 부지 중간 어디쯤 놓여있는 거다.


1851년에 지어져 1997년 감옥으로서 기능을 다 할 때까지 약 150년간 빅토리아주의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의 옛 정식 명칭은 ‘구 여왕 폐하의 펜트리지 감옥 (Her Majesty’s Pentridge Prison)’이다. 줄여서 펜트리지 또는 펜트리지 감옥이라고 부른다.


사실 멜버른에서 가장 알려진 감옥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구 멜버른 감옥(Old Melbourne Gaol)이다. 구 멜버른 감옥은 멜버른을 대표하는 문화유적 관광지 중 하나다. 구 멜버른 감옥은 멜버른에 설립된 최초의 감옥으로, 펜트리지 감옥보다는 20년 정도 먼저 지어졌다. 그러나 그 규모가 크지 않아 많은 죄수를 수감할 수 없었기에 늘어나는 죄수를 수감하기 위해 그 당시에는 도시의 먼 외곽 지역이었던 현재의 코버그(Coburg) 지역에 펜트리지 감옥을 지었다. 두 감옥이 같이 사용이 되다가, 구 멜버른 감옥은 1920년대에 감옥으로서 기능을 다한 뒤 현재는 입장권을 구매해야 들어갈 수 있는 체험형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그림3. 구 멜버른 감옥에서 진행중인 나이트 투어 프로그램 세 가지. 왼쪽부터 유령투어, 교수형투어, 밤 초소 투어. (출처: www.oldmelbournegaol.com.au)


그렇게 관광자원으로 재개발된 구 멜버른 감옥과는 달리, 펜트리지는 1997년까지 약 150년간 감옥으로서 기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도시가 커지면서 펜트리지 감옥이 위치한 코버그 지역도 멜버른의 주요 주거 지역이 되면서 펜트리지 감옥의 존재에 대한 거주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에 빅토리아 주정부는 또다시 도시 외곽에 새로운 감옥을 짓고 펜트리지를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펜트리지 감옥 부지와 건물들의 처분을 고민하던 정부는 민간에 매각하기로 하였고, 그에 따라 부동산 개발업체에 의한 일대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펜트리지 감옥 단지 전체가 빅토리아 주정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긴 했지만 모든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다. 건립 초기에 지어진 역사성이 큰 건물들은 보존하되, 비교적 최근에 새로 지어진 현대식 수감동들은 일부 또는 전부 철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곳에 주거, 상업, 문화 기능을 겸비한 복합 시설로 재개발하기로 방향이 잡혔다.


페리카나가 입점한 건물에는 동네 주민들의 편의를 위한 슈퍼마켓부터 식당, 젤라또 가게, 카페, 옷가게, 미용실, 영화관까지 들어와 있어 웬만한 일상생활과 여가 생활을 즐기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에 조만간 고급 호텔도 추가로 건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림4. 옛 펜트리지 감옥 부지 내에 지어지고 있는 주거용 아파트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다 같은 감옥인데 구 멜버른 감옥은 그대로 보존되어 관광지가 되고, 펜트리지 감옥은 주거와 상업 기능을 중심으로 재개발되었을까. 두 감옥 모두 주(state)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인데 말이다. 보통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곳을 보존하면 보존했지 이렇게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장소로써 재개발을 하는 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 같다. 더군다나 감옥이라는 공간 자체가 썩 유쾌한 공간은 아니지 않은가.


펜트리지 감옥은 호주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마지막까지 사형이 집행되던 장소였다. 1965년 탈옥 과정에서 교도관을 총기로 살해한 죄로 1967년 교수형을 당한 로널드 라이언(Ronald Ryan). 그의 범죄는 그 증거의 명확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많아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여론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형은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이로 인해 빅토리아주에서는 대규모 사형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그 후 약 10년에 지난 1975년 사형제가 폐지되었다 (참고로 1984년에 서호주를 마지막으로 호주 전역에서 사형제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또한 이 감옥에서 일어났던 인권 유린의 사건 사고들도 참혹했다고 한다. 이 감옥에서 사형된 사람 11명을 비롯해 감옥 내 폭행 등 사건 사고로 사망한 사람을 다 합하면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하니, 그랬던 이 땅 위에 아무 일 없었던 마냥 즐거운 일상을 보내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5. 로널드 라이언 사형 집행 반대 시위를 위해 펜트리지 감옥 앞에서 시위중인 사람들 (사진저작권 : Bill Tindale)


이러한 복합한 사정 때문인지 1997년에 감옥이 외곽으로 옮겨간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개발되기까지 대략 20년이 걸렸다. 그 긴 기간 동안 민간의 개발 주체도 여러 번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개발의 형태에 대한 이견도 많았다. 특히 감옥 건물을 아예 불도저로 깨끗이 밀어버리고 깔끔한 주거지로 재개발하자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도 있었다. 원래 이 감옥 부지가 위치해 있는 동네 이름도 감옥과 동일하게 ‘펜트리지’ 였는데, 그 명칭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 소위 낙인효과 때문에 주민들이 정부에 민원을 넣어 지역명을 코버그(Coburg)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니 펜트리지 감옥을 쳐다보기도 싫었을 주민들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 감옥이 가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가치에 공감하며 보존을 원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만만치가 않았기에, 결국 과거의 역사를 일부 간직하면서도 커져가는 문화시설, 주택수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타협점을 찾았다.


펜트리지 수감동 중 D수감동은 와인 셀러로 개조되어 민간에 분양이 되었다. 이 감옥이 멜버른 근처에서 많이 생산되는 청석(bluestone)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보니 감방의 실내 온도가 적당히 낮게 유지되어 와인 보관에 제격이라고 한다. 감방 하나당 분양가가 낮은 가격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양 경쟁이 꽤 치열했다. 특히 한 와인셀러는 그 방에 예전에 수감되었던 사람에게 분양이 되어 화재가 되기도 했다.

그림6. 와인 셀러로 고급스럽게 변신한 D수감동 'Pentridge Cellars'
그림7. Pentridge Cellars 내부. 오크통이 몇개 보인다. 여기가 호주에서 마지막으로 교수형이 이루어졌던 수감동이다.
그림8. 펜트리지 감옥 벽과 돌을 활용하여 건설한 주거용 빌라들


펜트리지 감옥의 개발 전 모습을 담은 <Pentridge Prison Inside Out> 사진집을 펴낸 아드리안 디들릭(Adrian Didlick)은 약 10년 전 처음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펜트리지를 발견하고는 몰래 담장을 넘고 입구를 따고 들어갔다가 이 공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단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가 처음 방치되어 있던 펜트리지 감옥의 내부에 들어갔을 때 그곳의 상태는 ‘처참’해서 그 공간을 보는 순간 뒷골이 서늘했다고 한다. 햇살조차 외면한 작고, 춥고, 눅눅한 감방들. 이곳을 지나쳐간 사람들과 아이들의 증오와 두려움, 절망의 흔적들이 감옥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림9. 펜트리지 투어에 참가하면 들어가 볼 수 있는 내부 시설 일부. 버려진 감시탑과 철문들이 을씨년스럽다.


작가는 이렇게 한 도시의 어둡고 더러운 치부가 민낯을 드러낸 채로 버려져있느니 차라리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것이라 했다.

그림10. 작은 공원으로 새롭게 가꿔진 펜트리지 감옥 부지 내부 모습. 이곳이 한때는 어둡고 암울한 장소였다는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곳의 흔적들 중 일부는 남겨지기로 결정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멜버니안들은 어느새 이곳의 어두웠던 기억 위에 새로운 삶을 얹어 나가고 있다. 아이들은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연인들은 주말의 브런치를 즐기고, 누군가는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면서.

그림11. 감옥 통로 뒤쪽으로 놀이터에서 오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

나에게 이곳은 박보검 배우가 선전하는 보면서 한국 치킨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150년 된 감옥이 있던 자리에서 고국의 맛을 느낀다는 건 좀 요상한 조합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를 방문하는 것처럼 일회적인 경험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빠듯했던 하루를 보내고 가만히 한 숨 돌릴 여유를 찾고 싶을 때, 혹은 뜨거운 여름 햇살이 저물고 치킨에 맥주 한 잔이 간절할 때 나는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이곳에서 저녁 바람을 벗 삼아 가볍게 산책을 하며 과거와 현재 사이 모호한 경계 어딘가에서 이 공간이 들려주는 때로는 소름 돋고 때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참고기사

1. https://www.theage.com.au/national/victoria/outrage-at-19-storey-apartment-plan-for-former-pentridge-prison-20151227-glve9r.html

2. https://www.abc.net.au/news/2020-01-05/ronald-ryan-australias-last-man-hanged-victoria-murder/11751244

3. https://www.news.com.au/national/crime/ghastly-frightful-the-last-australian-executed-by-hanging/news-story/5ce858083eaebb5785739c1ece4c5f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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