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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폴로 Jan 15. 2023

멜버른이 '정원의 도시'가 되기까지

멜버른 왕립 식물원, 로열 공원(Royal Park)

멜버른으로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멜버른 여행이 정말 좋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멜버른에 공원이 많았기 때문이란다. 일반적인 대도시들과 다르게 도심 곳곳에 공원이 워낙 많아서 소위 ‘힐링’을 하기에 최고였다고 한다.


멜버른의 많은 공원들은 이 도시를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든 중요한 요소다. 자연을 사랑하는 호주인들의 마음도 대단하지만, 멜버니언들의 정원/공원(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gardens, park, reserve 등으로 불리지만 이 글에서는 구별하지 않고 쓰겠다)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 오죽하면 1977년부터 1994년까지 약 17년간 빅토리아 주 자동차 번호판에 삽입된 주 상징 표어가 ‘VICTORIA – GARDEN STATE('정원의 주' 빅토리아)’였을까. (참고로 호주 자동차들의 번호판에는 그 번호판을 등록한 주의 표어가 같이 들어가는데, 주기적으로 바뀐다).

그림1. 1977년 도입된 빅토리아 주 자동차 번호판(출처 : gardenworld.com.au)

멜버니언들이 근거없이 자신들의 공원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빅토리아 주에는 32개의 식물원(botanic garden)이 있다. 사실 인구는 적고 땅은 넓은 호주 같은 나라는 녹지를 보존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는 부동산 가격이 낮은 외곽지역이나 시골 지역에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녹지들이 도심 속에 있거나 도심 매우 가까이에 위치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진다. 빅토리아 주는 호주 모든 주들 중 시내 중심가(CBD) 반경 5킬로미터 이내에 가장 많은 공원과 정원을 가지고 있다. 크고 작은 공원들의 개수를 다 합하면 약 125개에 달하며, 총면적이 약 145만 평(480헥타르)에 달한다. 빅토리아 주의 공원 유관 산업은 호주 내 다른 주들에 비해 규모가 가장 큰 약 27억 달러로, 종사자도 1만 5천 명에 달한다.


이 공원들은 멜버른을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준다. 멜버른의 여름 날씨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대체로 선선하고 건조하지만, 햇빛이 워낙 강렬하고 가끔은 기온이 40도를 웃돌기도 하기 때문에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은 정말 소중하다. 점심시간에 공원에 가보면 벤치에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는 멜버니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침이나 오후 시간엔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주말이면 공원 내 공용 야외 바비큐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산책 나온 가족들로 붐빈다. 팍팍한 도시인들의 긴장감을 줄여주고 스트레스를 풀기에 공원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멜버른의 대표적인 공원은 멜버른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Victoria)이다. 1846년 설립된 오래된 정원인데, 규모가 약 10만 평(36 헥타르)에 달하고, 5만 종 이상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자자한 명성만큼 연간 약 150만 명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입장료는 없다). 키 큰 나무들, 철 따라 피고 지는 각양각색의 꽃나무와 관목들은 사시사철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정을 준다.

그림2. 멜버른 왕립 식물원. 각양각색의 식물들 사이에 작은 연못들도 많다.
그림3. 멜버른 왕립 식물원 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바람의 사원(Temple of the Winds)’. 조용한 돌계단에 앉아 내려다보는 야라 강 풍경이 멋지다


멜버른은 하루아침에 ‘정원의 도시’가 된 것이 아니다. 1850년경 오늘날의 멜버른 땅에 발을 디딘 영국인들은 멜버른의 자연환경에 첫눈에 반했다. 탁 트인 들판, 깨끗하고 풍부한 야라 강과 부드러운 목초지, 온화한 날씨는 영국의 자연환경과 비할 수 없는 원시적 자유로움을 선사해 줄 우아함을 갖춘 곳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금이 발견되기 이전이라, 영국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은 이곳을 목축업에 적합한 곳으로 생각했다. 영국 정부는 정착 초기부터 멜버른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들을 지정하고 개발을 제재하기도 했다.


1908년 빅토리아 주의 토지부(Ministry of Lands)는 미래의 정착민들을 위한 안내 책자를 발간하는데, 그 책자의 표지에서도 빅토리아주가 정원의 도시임을 내세웠다.

그림4. 1908년 빅토리아 주 정부에서 발간한 예비 정착민들을 위한 정보 책자 표지. ‘정원의 주 빅토리아'라고 되어있다 (출처 : 호주국립도서관)

책자 내용을 조금 인용하자면, 

“빅토리아주를 ‘호주의 정원의 주’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곳의 자연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준다. 비옥한 농토가 수백만 에이커에 달한다. 모든 고지대 땅들은 작물 생산이 가능하며, 고품질의 과일을 생산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기후는 마치 프랑스 남부처럼 온화하고 화창하다. 강수는 일정하고 충분하다. (이하 생략)”


도시 측량사(이들이 오늘날의 도시계획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와 정부 관료들은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도시 계획 초기부터 목초지로 남겨둘 넓은 땅의 개발을 유보하기로 했다. 이는 영국이나 여타 국가들에서 공원이 사람들의 건강에 유익한 장소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서 파견된 빅토리아주의 부총독 라트로브(Charles. J. La Trobe)도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1850년대 도심 가까이에 있는 넓은 땅들을 공원을 위한 땅으로 지정했다. 그중 대표적인 곳들이 오늘날의 야라 공원(Yarra Park), 로열 공원(Royal Park), 프린세스 공원(Princes Park) 등이다. 이 땅들이 공원 용지로 지정된 초기부터 잘 관리되어 온 것은 아니었다. 1850년대 야라 공원과 로열 공원은 가축들을 위한 목초지로 쓰였고, 1860년대 프린세스 공원은 분뇨폐기장 정도로 밖에 쓰이지 못했다.


그보다 앞서 공원 또는 식물원으로 개발된 곳들이 위에서 언급한 멜버른 왕립 식물원(Botanic Gardens)을 비롯한 오늘날의 피츠로이 공원(Fitzroy Gardens), 칼튼 공원(Carlton Gardens) 등이다. 특히 왕립 식물원의 경우, 1852년 독일의 정원사 페르디난드 뮐러(Ferdinand Mueller)를 조경책임자로 채용하여 이곳을 세계적 명성이 있는 식물원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기조는 당시 유행했던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 19세기말 미국에서 시작된 도시의 물리적 환경개선과 도덕적 질서 회복을 위한 혁신주의 운동으로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 등에 영향을 미쳤다)’의 영향을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멜버른의 공원들은 도시미화운동을 위한 일종의 자산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1910년 미군의 호주 주둔이 임박해지면서 도시의 가로와 공원의 경관을 향상시키기 위한 각종 노력이 시작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존에 버려진 땅을 알렉산드라 공원(Alexandra Gardens)으로 개발한 것이다.


1930년대 멜버른은 스스로를 '정원의 도시(Garden City, 일반적으로 '전원도시(19세기 영국에서 구상된 도시 모델로서, 도시 내부는 주거·산업·농업 기능이 균형을 갖추고 도시 주변은 그린벨트로 둘러싸여 있어 도시와 전원의 장점이 조화되는 자족적 계획도시(서울시 도시계획용어사전))'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정원의 도시'로 번역함)'로 관광 마케팅 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공공녹지에 대해 혁신적으로 개발을 해나갔다. 기존에 공원 용지로 남겨두었던 땅들도 경관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스포츠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로 한다. 당시 멜버른과 경쟁관계에 있던 시드니는 스스로를 ‘항구 도시(harbour city)’로, 브리즈번은 ‘햇살의 도시(city of sunshine)’로 홍보하고 있었다. 멜버른은 이에 대항한 자신들의 도시 정체성과 홍보 포인트를 ‘정원’으로 정했다.

그림5. 1939년 호주관광책자 ‘Walkabout’에 소개된 ‘정원의 도시 멜버른’ (출처 : 국립호주도서관)


사실 아름답게만 보이는 도시 내 공원 개발에도 문제는 있었다. 멜버른은 공원 또는 정원을 디자인하고 개발하면서 철저히 유럽의 스타일을 따랐다. 그 과정에서 호주 원주민들이 지켜온 자연환경과 경관적 특성은 대부분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당초 영국의 식민지로 개발된 멜버른의 레이더는 항상 유럽을 향하고 있었고,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진화라고 여겼다. 그러나 호주 원주민들은 유럽 정복자들과 항상 공존하고 있었고, 그들의 존재를 이 도시의 정체성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다.


일부 공원들에서 원주민들이 자연을 활용했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피츠로이 공원(Fitzroy Gardens)에 가면 이상한 모양의 나무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흉터 있는 나무(Scarred tree)’다. 이 나무들이 이러한 흉터를 가지게 된 이유는 호주 원주민 우룬제리 부족이 주로 유칼립투스 나무를 배, 집, 방패, 보관함 등으로 활용하기 위해 돌도끼로 나무껍질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흔적들은 유럽인이 이곳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호주 원주민이 살아왔음을 상기시킨다. 이 나무(그림6)는 수년간 죽어 있다가 1980년대 초 쓰러졌다. 이 나무 밑동을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원래 나무가 있던 자리에 다시 심었다.

그림6. 피츠로이 공원에 복원된 ‘흉터 있는 나무’

이보다 더 적극적인 사례는 ‘로열 공원(Royal Park)’이다. 멜버른 도심(CBD)의 북쪽 끝에서부터 약 1.7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 규모는 도심 근처 공원 중 가장 큰 약 56만 8천 평(188헥타르)에 달한다. 관광객들에게는 이 공원 내에 있는 멜버른 동물원(Melbourne Zoo)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동물원 이외에도 하키센터, 네트볼장, 골프장 등 운동 시설과 달리기 트랙 등이 갖추어진 공원이다.

그림7. 로열 공원 위성사진 (출처 : Participate Melbourne)

그런데 이 공원의 생김새는 아름답게 가꾸어진 도시의 여타 공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너무나 꾸며지지 않은 느낌이라, 점잖게 표현하면 ‘원시적인’ 모습을 잘 보존한 것도 같고, 다르게 표현하면 보면 미완성된 것도 같다. 특히 로열 공원 내에 일명 ‘서클(circle, 원)’이라 불리는 원형 모양의 부지에 가보면 어떤 느낌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그림7. 속 가운데 큰 원형 부분). 전체 지름이 약 1.4km인 넓은 원형 땅 안쪽으로는 나무도 몇 그루 없고 수풀만 우거져 있다. 원형 지름을 따라 아스팔트 트랙과 간간히 놓인 식수대와 벤치가 전부이다. 워낙에 트여있는 덕분에 맑은 날에는 CBD의 스카이라인이 아주 잘 보이고, 비가 갠 뒤에는 무지개의 끝에서 끝을 볼 수 있는데, 도심이 바로 눈앞에 보임에도, 도심 가까이에 있지 않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그림8, 9. 로열 공원 내 ‘서클’ 바깥 트랙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멜버른 CBD의 스카이 라인 (위), 비 온 뒤 무지개가 뜬 모습(아래)


이곳의 정식 명칭은 ‘원시 초원 서클(Native Grassland Circle)’이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호주 원주민들과 관련이 되어있는 땅이다. 그런데 이 땅이 줄곧 원시적 모습을 보존해 온 것은 아니었다. 1840년대 라 트로브 부총독의 비전에 따라 지정된 공원 부지 중 로열 공원은 매우 중요한 요소여서, 1854년 부총독이 빅토리아 주를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 직접 향후 공원의 경계선을 지정했다고 한다.


로열 공원은 역사적 시기나 필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공원부지 지정 초기인 1850년대부터 크리켓, 축구, 골프 등 각종 운동 경기가 열리기도 하고, 대중을 위한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1876년 이곳이 공식적으로 공원으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많은 부지가 거주용도로 사용되면서 공원의 규모가 일부 줄어들었다. 또한 1860년대에는 이곳에 과학실험농장이 설립되는 등 농업기술 개발을 위한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멜버른 동물원이 있는 자리에는 1861년부터 해외에서 수입한 동물들을 기후에 적응시키는 구역으로 활용되다가, 1862년 로열 멜버른 동물원(Royal Melbourne Zoological Gardens, 오늘날은 Melbourne Zoo라고 부른다)이 개관을 한다. 참고로 이 동물원은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

그림10. 1862년경 해외에서 들여온 동물들을 멜버른 기후에 적응시키는 모습. 낙타, 코끼리, 원숭이, 사자 등을 들여왔다고 한다. (출처 : 빅토리아주립도서관)

19세기 후반부터는 이 부지가 화약고 등 군사적 용도로까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시기에는 군인들의 캠프로도 사용되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미군들의 주둔지로 활용되면서 당시 미공군 소령 플로이드 펠(Floyd Pell)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캠프 펠(Camp Pell)’으로 불렀다. 또한 로열어린이병원을 포함한 병원과 공중보건시설들도 이 공원 부지에 설립되었다.

그림11. 앞쪽 고층 건물이 로열병원이고, 그 왼편 뒤쪽으로 군 막사들이 보인다(1920년-1954년 사이) (출처 : 빅토리아주립도서관)

문제는 종전 이후에 발생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군이 철수하면서 빅토리아주 주택위원회는 ‘캠프 펠’이 있던 곳에 긴급 공공 주택을 짓기로 했다. 당시 정부의 계획은 새로운 공공 주택을 만들기 전까지 1년 정도만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아주 최소한의 주거를 위한 여건만 갖추었다. 그러나 정부의 계획은 계속 지연되어 이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이곳은 멜버른 최악의 슬럼가로 변모했다. 한때는 3천 명 까지도 수용을 했던 이곳에서 사람들은 공동 세면 및 조리 시설을 사용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수렁으로 변했다. 아이들은 신발도 없이 더러운 옷을 걸치고 놀았고, 여름에는 주석으로 만든 집의 열기로 인해 야외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1940년대 후반 멜버른에는 빈곤층을 위한 주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멜버른 정부는 도시 빈민가를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고층빌딩 숲 속 작은 오두막 한 채에 담긴 사연>편의 ‘리틀 론(Little Lon)’이 멜버른 생성 초기인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가난한 해외 이민자들을 주로 수용하면서 생성된 빈민가였고 정부의 빈민가 없애기(slum clearance) 정책으로 인해 재개발된 곳이었던데 반해, 전후 ‘캠프 펠’이 빈민촌으로 사용되던 1950년대에는 유럽의 ‘중산층’ 이민자들이 멜버른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이들이 기존의 호주인(영국계 백인들) 빈곤층이 주로 거주하던 리치몬드(Richmond), 피츠로이(Fitzroy), 세인트 킬다(St Kilda), 칼튼(Carlton) 등 도심 근교 지역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정부의 빈민가 없애기 정책과 함께 기존 호주 빈곤층을 다른 곳으로 몰아내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났다. 그렇게 쫓겨난 사람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최후에 선택한 곳이 ‘캠프 펠’이었다.

그림12. 1946년 경 ‘캠프 펠’ 지역 임시 주택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출처 : 멜버른시립도서관)

‘캠프 펠’에서는 각종 질병의 발생하기 시작했고, 과밀 문제로 인해 거주 여건은 점차 열악해져 갔다. 언론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범죄 등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캠프 펠’ 외부에 있는 멜버니언들에게 이곳은 범죄와 빈곤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이곳의 별칭이 ‘캠프 헬(Camp Hell, ’ 지옥 캠프‘라는 뜻으로 원 명칭이었던 Camp Pell의 ’P‘를 ’H‘로 바꾼 명칭)’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언론은 이곳을 없애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1953년 알거스(Argus) 신문은 “이곳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은 멜버른에게는 수치이고, 빅토리아 주정부의 실패를 보여주는 척도다”,  “총 3천 명의 629 가구가 이 추잡한 구멍 속에 살고 있다”라고 썼다.


그러나 정부는 제대로 된 주거 대책을 세우기보다 이곳을 어떤 방법으로든 없애기에 급급했다.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멜버른은 다시금 번영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특히 1956년 올림픽 개최 계획에 맞추어 올림픽 전에 어떻게든 이곳을 철거하고자 했다. 도심 가까이에 이런 최악의 빈민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5년 노동당 정부(Labor Government)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퇴거시켰으나, 갈 곳이 없었던 약 600여 가구가 끝까지 이에 저항하며 완벽히 이곳을 없애는데는 실패했다. 이에 1955년 자유당 대표였던 헨리 볼트는 ‘캠프 펠’ 철거를 자신의 주요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며 당선되었다. 1956년 5월 마침내 끝까지 남아 있던 50여 가구의 주민들 대부분이 11월 올림픽 전까지 공공 주택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이 최악의 빈민가는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까지 로열 공원은 멜버른에서 잊혀진 공간이었다.


이곳이 다시 ‘공원’의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로열 공원 마스터 플랜’이 실행되면서부터다. 멜버른 시정부는 이 거대한 공원에 대한 마스터플랜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이때 당선된 마스터플랜의 골자가 호주 원주민들의 자연경관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원주민들의 땅에 공원을 만들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갈 곳 없는 영국계 호주인들을 몰아낸 뒤 다시 공원화하겠다고 선택한 방향이 결국은 원주민 경관 복원이라니.


어쨌든 당선안을 제안했던 브라이언 스테포드(Brian Stafford)와 론 존스(Ron Jones)이 최우선 장기 목표로 내세운 것이 ‘호주 땅과 공간의 본래적 경관 특성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칙적으로 ‘추가적인 개발이나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대신, 기존의 경관을 수정하고 명확화’ 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들은 네 가지 경관 디자인 이미지를 로열 공원의 고유한 특징으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땅의 형태와 지평선’, ‘하늘과 바람’, ‘광활한 초원’, ‘나무 형태와 윤곽’이었다(그림13). 언뜻 들었을때는 매우 추상적인 표현들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로열 공원을 방문해 보면 그 계획들이 어느정도 잘 구현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림13. ‘1984 로열 공원 마스터플랜’에 제시된 네 가지 경관 이미지 (출처 : ‘로열 공원 마스터플랜’, 1998, 멜버른시정부)

개인적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 1984년 마스터플랜은 세부 실행 과정에서 일부 보완 또는 변경되긴 했지만, 당초의 방향성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며, 시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행되고 있다(1997년 수정된 마스터플랜이 발표되었고, 이 계획에 대해 2023년 6월까지 2년간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https://participate.melbourne.vic.gov.au/royal-park-master-plan-review에 방문하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공원 부지가 워낙 넓고 도심 가까이 있다 보니 이곳에 대한 개발 압력도 만만치 않았다. 2014년 빅토리아 주정부는 이 공원 부지 일부를 활용하여 동서고속도로(East West Link) 연결도로 설치, 트램 철도 재조정, 차도 확장 등 대규모 교통 인프라를 신설할 계획을 발표했으나(그림14),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뿐만 아니라 교통 전문가들까지도 이 고속도로의 효과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비판을 제기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노동당 총수이자 현 빅토리아 주 수상인 다니엘 앤드류스(Daniel Andrews)는 이 프로젝트를 비판하는 캠페인을 펼치며, 노동당 정부가 선거에서 집권하게 된다면 이 프로젝트를 백지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이 고속도로 프로젝트는 백지화되었다 (대신 다른 지역에 대규모 교통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림14. 2014년 빅토리아 주정부가 발표한 로열 공원 부지 일부를 활용한 동서고속도로 설치 계획안(출처 : 빅토리아 주정부)


로열 공원은 다른 멜버른의 공원들에 비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현 상태만 놓고 보았을 때 이 공원만큼 ‘호주스러운’ 공원이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이 로열 공원이 성공적인지에 대해서는 찬반 여론이 있다. 다소 모순적이고 선택적 역사 표현 방식(이 공원의 경우는 유럽인들의 역사보다는 호주 원주민들의 자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복원되었다), 도심과 가까운 너른 공간의 낮은 활용도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멜버른이 앞으로도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인 ‘정원’을 계속 가지고 갈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정원의 도시’ 멜버른은 현재 진행형이다.     




참고 자료 및 사이트

1. https://gardenworld.com.au/2012/09/05/bring-back-the-garden-state/

2. A History of the city of Melbourne’s urban environment (City of Melbourne, 2012) 중 7장. ‘Appreciating and adapting the natural environment'

3. http://www.fitzroygardens.com/Scarred_Tree.htm#:~:text=The%20Scarred%20tree%20is%20a,%2C%20shelters%2C%20shields%20and%20containers.’

4. Royal Melbourne Zoological Garden (Victorian Heritage Database Report)

5. Royal Park (Victorian Heritage Database Report)

6. Royal Park : Assessment of Cultural Heritage Significance & Executive Director Recommendation to the Heritage Council (Heritage Victoria)

7. https://adamsh.wordpress.com/2014/07/25/camp-hell/

8. https://www.urbancamp.org.au/our-history

9. https://www.abc.net.au/news/2018-08-17/curious-melbourne-parkville-one-of-melbournes-roughest-areas/10061862

10. 1997 Royal Park Master Plan(City of melbourne, 1998)

11. https://www.heraldsun.com.au/leader/inner-east/parkville-royal-park-to-be-transformed-under-east-west-link-plans/news-story/7c8eff4ded4d5d02a04bece3c81a09d4

12. https://melbournecircle.net/2015/05/23/the-strangeness-of-royal-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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