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 Oct 10. 2019

자소서 쓰기 전, 자서전을 쓰세요

취업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글쓰기 - 엘레멘트 BX디자이너 유문선

엘레멘트(LMNT) 신입 6개월차, BX 디자이너 유문선입니다. 
낮에는 디자인을 하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연어를 좋아합니다. 


졸업 전시회 준비와 포트폴리오 심사 때문에 정신없었던 대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그 시기 저를 따라다니며 자꾸 괴롭히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옛날 노트들을 뒤적거리니 이런 자기소개도 나옵니다..

포트폴리오는 평상시에 준비해 왔기에 차근차근 발전시킬 수 있었지만, 자기소개서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있는 그대로 써야 하는 건지,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이상적인 제 모습을 써야 하는 건지 고민했습니다.


고민도 잠시, 마감 날짜가 다가오면서 저는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책임감과 열정이 장난 아닌 사람”이라는 자기소개서를 썼습니다. 포트폴리오에도 혼을 담았죠. 그 결과, 한 브랜드 디자인 에이전시에 합격했습니다. 업계에서 유명한 대표님의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쌓아갈 생각에 무척 설렜습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이 모두 축하해 주었지요. 4년간의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도 들었고요. 회사 근처에 집도 구하고, 여행도 다녀왔어요. 모든 게 다 잘될 것 같았습니다.

출근 일주일 전채용 취소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만두려던 사람이 마음을 바꿔서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자존심 다 내려놓고 “정직원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인턴이라도 시켜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참 답답하고 먹먹했습니다. 디자인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됐어요. 좋아하던 회사에서 배신을 당하니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방황한 것 같아요. 주변은 다 출근하는 줄 알고 있고, 카톡으로는 “회사 괜찮니”, “수습 때는 열심히 해야 한다.” 등의 응원 문자가 왔지요. 차마 답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래도 다시 정신 차리고, 스펙이라도 쌓아보려고 디자인 교육과 강연 같은 것을 다녔어요. 그런데 시작하기 전에 꼭 자기소개를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명씩 일어나서 “안녕하세요. ~기업 디자이너 누구입니다.” 이런 형식으로 보통 자기소개를 해요.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나는 누구지? 나는 학생도 아니고, 디자이너도 아니고, 일반인? 취준생? 그러다가 이름만 말하고 앉았습니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어요. 

무소속. 


‘유문선’ 이름 세글자 말고 없는 저는 마치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하니 한 글자도 못 쓰겠더군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상황에서 행복해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내 성격의 장점은 무엇인지 갑자기 하나도 모르는 거에요. 취업을 위해 꾸며진 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포대교에서 만난 문장


저 자신에게 계속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글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자서전을 적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잘 쓸 필요는 없어요. 독자는 저 한 명이니 저만 알아볼 수 있게 쓰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자라왔고,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시기에는 무슨 생각을 했지 등 기억과 일기장 사진첩 등 모든 것을 찾아 뒤졌어요. 그리고 계속 써 내려갔어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 저의 자서전을 만든다 생각하고 제 과거를 쭉 써 내려 갔어요. 그렇게 계속 쓰면서 정리하니 조금씩 눈으로 보이더라고요. 내가 무슨 고민을 했었고 무슨 선택을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 내가 어디쯤 있는지.


글을 쓰고 눈으로 보니 냉정하게 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더군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좀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전보다 더 잘 알게 되니까 회사를 선택하는 기준부터, 인간관계, 취미 등 주변의 것들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조금 더 좋아하는 것에 투자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에는 회사를 선택할 때 막연히 브랜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회사를 선택했다면, 지금은 단순히 디자이너를 넘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 생각하고, 비전대로 성장하기 좋은 회사를 좀 더 꼼꼼하게 고르게 되었죠.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저의 비전, 회사에 대한 가치관, 인생관, 직업관 등이 이미 정리되어 있었으니까요.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어 요약만 하면 되었죠.


카페 = 집


참 후회가 됩니다이 작업을 왜 대학생 때 안 했는지왜 남들과 똑같이 되려고 그렇게 잠도 안자고 공모전 하고 스펙을 쌓았는지나답지 못한 것들에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는지이 글쓰는 작업을 왜 조금 더 일찍 시작 안 했는지요. 만약 대학생 때 자서전을 쓰는 작업을 했더라면, 앞으로 이 자서전을 어떻게 채울지 꿈꾸며 제가 하고 싶은 일들에 더 집중했을 것 같아요. 저는 좀 늦었지만 취업을 준비하면서 이 작업을 한 것이 참 다행입니다.


과거에는 저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어디로 가야 할지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가 어디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도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알고 있어요. 경험의 양이 늘어날수록 제 가치관도 좀 더 뚜렷해지겠지요. 지금의 자서전을 손에 쥐고 최대한 열린 생각으로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자서전을 비틀고, 수정하고, 또 새로 써내려가려 합니다.


외적인 모습을 냉정하게 보려면 거울을 봐야 하는 것처럼, 내면의 모습을 보는 방법은 글을 쓰는 거예요. 만약 이글을 보신 대학생이나, 취준생분들이 계신다면 취업이 아닌 나를 위한, 나답게 살기 위한 글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나를 위해 써야 할 것은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자서전이니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