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공책에는
공책의 겉장은 낡았고
앞쪽은 뭉텅뭉텅 찢어졌고
뒤쪽은 박박 지워 너절해졌다
아마 오래된 일기장이겠지
무엇을 썼던 것일까
무엇을 찢고 무엇을 지웠을까
꼭꼭 눌러쓴 탓에
공책의 뒷면에 뒷면에 뒷면까지 글자 자국이 새겨져있다
그렇게 애써 찢고 지우고 구겨버렸는데, 오랫동안 빛과 공기에 낡아 버렸는데
끝내 자국이 지워지지 않았다
맹인처럼 자국들을 만져본다
무딘 손가락끝 피부로 무엇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잊으려했던, 버리려했던 기억의 보복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그것들이 생각보다 괜찮은 것이었길, 차라리 소중한 것을 잃었길 바라본다
이제 내게 남은 것들은 구기지 않아도 낡은 것들
내가 버린 그것들이나마 빛나는 것이길
공책에 남은 자국들을 어루만지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