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지리하게 이어지는
시간과의 공(攻)방(防)전(戰)
나는 완전히 망가져서
도무지, 아무래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다
끝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어쩌면 그날이
바다로 가자
가장 가까운 바다
얕고 따뜻하고 해가 지는 곳
을왕리
늦은 오후의 태양과 열기
들뜬 기분들이 모래사장 위를 둥둥 떠다니고
음악은 서로 섞여 알 수 없는 소리가 되어 신이 났고
타닥타닥 조개구이가 익는 소리, 치익치익 고기를 굽는 소리
알록달록 파라솔, 얕게 철썩이는 서쪽 바다의 파도, 딱딱 터지는 작은 불꽃놀이
그 해변길을 오래도록 걸었어 물이 멀어질 때마다 물의 끝을 따라 계속 걸어갔지 해변의 커다란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캄캄한 밤이 되고 고래 뱃속같은 그 길을 한참이나 걸었어 그러다가 부드럽던 진흙바닥에 찰박찰박 물이 차오르고 신고 있던 하얀 아디다스 워킹화가 점점 젖어갔어 여기가 어딜까 저 멀리서 20세기 노래가 흘러나오고 문득 나는 아주 중요한 것을 20세기에 두고 왔는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준비물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에 참여할 수 없어 복도에 서 있어야하지 우리 엄마는 그런걸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야 20세기에 준비물을 두고 온 21세기의 나 그래서 나는 복도에 서 있었던 거야 하지만 복도는 나쁘지 않아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고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에서 약간 비켜서 있을 수 있거든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 잠시 치워놓는다면 그래 복도에서 벌을 받던 어떤 시간이 떠올라 교실 안은 밀집된 사람들의 열기와 이산화탄소로 조금은 불쾌한 공간이었어 선생님 우등생 열등생으로 나뉜 계급 구조도 싫었고 그런데 복도는 사람도 없고 그늘져서 아주 시원했어 다행히 선생님은 손을 들거나 무릎을 꿇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서 있으면 됐지 복도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모든 소리가 멀리서 들리던 그 시간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의 고요함을 알아버린 시간 그래 내 부적응은 20세기에 이미 결정된거야 내가 선택한거지
20세기 을왕리에는 가보지 않았어
21세기 을왕리에는 여전히 세계가 있고 나는 또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하고 시원한 밤바다 끝에 서 있네 내 하얀색 아디다스 워킹화가 젖고 있긴 하지만 20세기의 바람이 찾아올 것도 같아 그 복도에서 불던 바람 난 기다릴 수 있어 밤은 아주 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