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정수기를 들였다. 이사하면 바로 정수기를 설치하려고 했는데 설치하기까지 두 달이나 걸렸다. 바로 가전제품 파는 곳을 갈까? 코디에게 하면 현금도 받고 싸게 할 수 있다던데? 이런 고민으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때마침 지인이 정수기를 들인다고 해서 코디의 전화번호를 얻게 되었다. 현금도 받고 카드를 쓰면 할인도 된다고 하니 금상첨화 같지만 알고 보면 5년 노예계약이다. 그래도 정수기를 보면 뿌듯하다. 그동안 환경보호를 위해 하는 일이라곤 환경보호단체에 기부하는 것, 직장에서 개인컵 사용, 내가 받은 음식 다 먹기까지만 실천했다. 매일 나오는 생수 페트병을 보면 내가 플라스틱 세상에 일조하는 느낌이라 분리수거를 할 때마다 찔렸다. 로즈 핑크로 은은한 광택을 품은 정수기로 냉수를 받아먹으니 그동안 생수 페트병을 버린 묵은 체증이 내려갔다.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줄 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고 수도관을 뚫게 해 준 집주인에 감사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을 치사하게 6만 원 떼먹은 그 전 주인 놈 같으면 정수기는 또 설치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리고 우리 집엔 오락기가 들어왔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치우고 그 자리에 제법 큰 오락기가 들어섰다. 긴 방학을 맞이했지만 추운 날씨, 코로나 19로 나가 놀 수 없는 상황에 매번 심심해하는 딸아이를 위해 게임기를 사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남편이 갖다 준 오락기다. 딸아이를 위해 짜잔 하고 새롭게 구입한 선물이면 좋지만 코로나 19로 남편이 가게를 정리하면서 딸려온 물건이다. 그러니 그 오락기는 남편의 폐업 기념품으로 우리 집에 왔다. 오락기는 철권이라는 싸움류는 200개가 넘는 것 같았고, 테트리스와 방울방울도 있었다.
방울방울 게임을 하다 보니 20여 년 전 추억이 떠올랐다. 예전 남자 친구와 나는 오락실에서 약속 장소를 잡았었다. 그가 약속 시간보다 늦으면 나는 방울방울 게임을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코인 노래방에 들어가서 그 시절 유행하는 노래를 불렀었다. 이렇게 노래를 불러도 왜 안 오지? 하고 나가보면 그는 열창하는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보조개를 깊이 패며 열심히 철권 게임을 하곤 했었다. 그 시절 남자 친구가 당연히 지금의 남편 일리는 없다. 게임을 보니 나의 대학 시절이 떠오르고 문득 그가 생각났다. 건너들은 말로는 스포츠카에 욜로 인생을 산다고 들었다.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니 결혼을 했을 수도 아니면 욜로의 삶을 더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폐업 기념으로 들어온 오락기를 보며 우리 가정의 처지가 짠하다가도 테트리스와 방울방울에 금세 몰입하는 나를 보면 참 철딱서니 없음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남편이 폐업을 했는데도 당장의 벌이가 많이 줄었는데도 걱정하지 않는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넉넉지 않지만 쓸 만큼은 항상 있었고, 점수가 평소보다 굴러 떨어졌지만 대학에 합격할 만큼은 받았고, 작년 뇌출혈로 큰 수술을 한 엄마도 2개월 만에 완전히 돌아왔고, 아이도 건강하게 자라는 중이고.. 그래도 럭키한 구석이 있는 팔자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살아온 나의 정신 승리일까?
지금은 코로나로 모두 힘들지만 그래도 20년 전 붕어빵 장사로 월 400을 번 남편의 생활력을 믿기에, 내 직업은 1년 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종속변수가 크지만 나의 긍정 회로를 믿기에 폐업 기념품 오락기도 기꺼이 선물처럼 받아들여야겠다.
며칠 뒤면 요상한 물건이 도착할 것이다. 한동안 옷 사이트에 안 들어갔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눈에 들어왔다. 빅 카라 검정 티에 밑에는 꽃무늬가 화려한 부클 소재의 스커트, 여리한 쇼핑몰 모델의 몸에 감히 내 몸을 대입해서 샀지만 적립금 16000원을 써서 엄청 싸게 샀다. 이 물건은 나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해 줄까? 성공이든 실패든 이제 정말로 옷은 안사야겠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