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눈에 보이지도 않는 토마토 씨를 심었다. 처음에 새싹이 났을 때 과연 이것이 토마토의 새싹인지 잡초의 새싹인지 헷갈렸다. 잡초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나는 간절히 정체 모를 새싹이 토마토이길 바랐다. 미심쩍긴 했지만 나는 꼬박꼬박 물을 주고 돌봐주었다. 2% 정도 의구심이 들었지만 식물 줄기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는 것이 제법 토마토 다움을 갖춰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식물은 무럭무럭 커 갔다. 아직은 뭔지 모르지만 말이다. 코로나로 인한 돌봄 공백이 생긴 우리 딸 때문에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며칠 머물게 되셨다. 식물 박사인 어머니께서 내 2% 의구심을 싹 걷어주셨다.
"어머니 이거 토마토 맞아요?"라는 내 물음에 어머니는 단칼에 대답해주셨다. "응"
나의 소박한 정성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받았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그날부터 나는 그 식물에 더 애착이 생겼다. 물만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애착도 먹고 자라는지 나의 토마토는 나날이 성장했다. 쑥쑥 컸다. 그런데 토마토가 너무 위로만 자랐다. 분갈이를 해줘야 하나? 식물 문외한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사실 알 길이 있었지만(지식인이나 너튜브 검색)그런 정성까진 기울이긴 귀찮았다. 며칠 뒤 관찰한 내 토마토는 뿌리까지 흙 밖으로 뛰쳐나와 있었다. 왜 진작 갈아주지 않았냐고 뿌리의 모습은 날 선 공룡 발톱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다이소에서 큰 화분과 흙을 사서 옮겨 심었다. 그런데 분갈이를 한지 고작 사흘이 흘렀을까?
내 토마토는 고꾸라져버렸다. 애써 키웠는데 이렇게 순식간에 뚝 부러져버리다니 아쉬웠다. 열매를 맺지 못한 아쉬움인지, 더 정성 들여 돌보지 못한 아쉬움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나의 토마토는 생을 마감했다. 매정한 나는 흙으로 덮어주지 않고 붉은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내 손을 거쳐간 식물들은 다 결실을 맺지 못하고 죽어갔다. 나는 식물 killer다. 지금 토마토가 자란 화분에는 다시 파가 자라고 있다. 이번에는 식물을 잘 키워야지라는 결연한 의지로 파를 키운 것은 아니다. 토마토를 잘 돌보지 못한 죄책감으로 파를 심은 것도 아니다. 부끄럽지만 며칠 전 화분과 흙이 아까워서 파를 심었다. 마트에서 산 파의 뿌리 부분만 잘라서 흙을 덮어 주었다. 나의 불순한 의도를 파는 아는지 모르지만 날마다 쑥쑥 자란다. 싹이 움트길 기다리고 정성 들인 토마토보다 있는 듯 없는 듯 키우는 파가 더 잘 자르는 것은 아이러니다. 사람 또한 이렇겠지? 지나친 관심보다는 한 번씩 곁을 내주는 관심이 사람을 더 성장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토의 죽음이, 파의 성장이 식물 killer 나를 생각하게 해 줬다.
다음부터는 얼굴이 없는 작은 생명도 세심하게 돌볼 수 있는 gardener로 변모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우리 딸도 우리 집 파처럼 잘 자라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저 방 너머 딸의 짜증이 들린다. 영어가 뜻대로 안 되나 보다. 평화로운 가드너로서 너를 키우고 싶은데 아 너는 정녕 나의 사악한 관심을 원하느뇨? 제발 스스로 그녀의 화가 풀리길 바라며 내일을 위해 휘리릭 자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