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지, 아저씨 그리고 어른이 어린이를 대하는 자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by 아무거나

티브이를 보다가 아이의 귓구멍 속의 귀지가 궁금해서 누워보라고 했다. 쪼그만 귓구멍을 좌로 우로 늘리며 귀지를 살피던 중에 딸이 내게 말했다. " 엄마, 나 오늘 성격 좋은 아저씨를 만났어!" 그때부터 잘 보였던 귀지가 보이지 않고 순간 멍해졌다.
"그 아저씨가 몇 살쯤 되어 보였니?"
" 한 40대쯤?"
"야, 네가 그 아저씨가 성격이 좋은지 나쁜 사람인지 어떻게 알아? 그래서 너 뭐라고 얘기했어?"
" 이름이 뭔지 물어봐서 000이라고 하고 3학년이라고 말했어. 내가 5단지에서 3단지로 이사 왔다고 했어."
"야, 너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니 신상을 그렇게 밝히면 어떡하냐? 그리고 그 아저씨는 왜 그렇게 물어본다니? 다음번에는 인사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마!" 하고 버럭 성질을 아이한테 내버렸다. 옆에 듣고 있던 동생도 나를 거들었다.
"조두순 알지 그 사람도 처음에 좋게 접근했어. 모르는 사람이랑 절대 이야기하지 마. 그 아저씨 정말 이상하네"하고 말이다.
아이는 우리 둘의 반응을 보고 몹시 당황했다. 어른을 만나면 응당 인사를 해야 하고 어른들이 물으면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나도 가르쳤고 아이도 그렇게 배워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른의 대답에 친절하게 답하는 바람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내게 혼이 났다.
15층에 살던 아저씨는 우연히 우리 딸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고 침묵이 흐르는 어색한 공간이 싫어서 자상하게 말을 걸어줬을 것이다. 어떤 나쁜 의도도 없었을 텐데 조두순까지 들먹이게 되는 사회적 불신의 상황이 서글펐다. 날이 선 내 모습에 흠짓 놀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경계를 풀 수도 없는 것이 가족을 둔 우리의 마음일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지만 매체로 접하는 나쁜 사람들 때문에 켜켜이 우리 스스로 방어막을 쌓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나도 내 딸 또래의 아이들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반가운 마음에 3학년이니? 몇 반이니? 하고 아이의 신상을 물어본 적이 꽤 있다. 사람을 해칠 것 같이 생기지는 않고 친절해 보이는 아줌마의 질문에 아이들은 빗장을 풀듯이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던 대답을 술술 풀어됐던 기억도 떠 올랐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나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그리고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의 세계가 또 떠올랐다. 수업이 끝나고 비가 꽤 내리는데 우산 없이 한 어린이가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것을 김소영 작가는 발견한다. 작가는 우산을 씌워주는 친절을 베푸는 것을 엄청 고민을 한다. 나 때문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때문에 김소영 작가는 선 뜻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 없었다. 그러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김소영 작가는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준다. 어린이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어린이가 무서워하는 것도 싫고 , 안심하는 것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침묵을 했다. 그리고 헤어질 지점이 왔는데도 비의 기세가 여전하여 " 저는 이쪽으로 가야 돼요. 그런데 어린이가 괜찮다면 조금 더 씌워줄게요. 아니면 제 우산 가지고 나중에 돌려줘도 돼요"라고 아이에게 김소영 작가가 말했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그래도 길 건너까지 씌워달라고 김소영 작가에게 말했다. 아이와의 어깨 부딪힘도 조심히 하면서 아이에게 집이 머냐고 물어본다. 아이가 김소영 작가에게 선뜻 자신의 주소를 말하려고 하자 김소영 작가는 다급히 아이의 말을 막았고 " 저한테 집은 알려주면 안 되니까 집까지 데려다 주지는 않을게요. 대신에 길 건너 0단지 입구까지 같이 가요"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아이는 김소영 작가에게 "다정한 분이시네요." 라는 말을 건네고 둘은 아파트 입구에서 헤어졌다.
만약 비를 맞는 아이가 있다면 나도 선뜻 우산을 씌워주며 그 아이 집 앞까지 데려다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집을 낯선 어른인 내가 안다는 사실은 어쩌면 부모에게 불안한 공포를 심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나는 해 본 적이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나오는 김소영 작가를 보고 나는 많이 반성했다. 나의 다정함도 적정한 선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어른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정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낯선 어린이들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기로 해요. 마스크를 쓰고 다정한 눈빛으로만 교환해도 어린이들에게는 충분한 것 같아요. 적정한 선이 우리가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출처: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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