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를 하며 느낀 점
1년에 100권 이상 읽는 다독가에 비하면 나는 결코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매번 통계 자료로 나오는 대한민국 성인 평균 독서량보다는 많이 읽는다. 그리고 매번 내 방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책은 나의 독서량을 가볍게 웃돈다. 한 권을 다 읽을 쯤이면 적게는 두 권, 많게는 다섯 권을 새로 산다.
책장이 가득 차고 나서는 한동안 그냥 책상 귀퉁이나 바닥에 쌓아 올렸다. 그러다 무너지기도 하고, 제일 아래에 깔린 책은 기분 탓인지 이전보다 얇아진 것 같기도 하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빈 박스를 모으기 시작했다. 다행히 택배를 자주 받아서 박스가 많이 생겼다. 책장처럼 박스를 옆으로 눕혀 쌓아 올렸다. 그냥 바닥에 쌓아둔 것보다는 확실히 보기에 좋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금방 박스가 부족해졌다. 다시 바닥에, 책상에 책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3칸 책장을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책장을 하나 더 구입하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박스를 여러 개 쌓아 책장으로 쓰면서 만들어진 책장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는 걸 느꼈다. 물론 깔끔함과 튼튼함은 제대로 기획하여 만든 제품을 따라가진 못한다. 사실 나은 점이라고 해봤자 '극한의 빈티지 풍'이라는 것 하나밖에 없다. 물론 유튜브에는 굉장히 공을 들여, 박스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인 책장을 만들어내기도 하더라. 하지만 내게 그럴 만한 열정은 없었고, 단순히 쌓아두기만 해도 책장으로서 충분히 역할을 해버려 없는 열정을 끌어낼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극한의 빈티지 풍 책장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괜찮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책장을 사거나, 유튜브 속 귀찮은 공정이 필요한 박스 책장을 만들어야 하니까. 나는 지저분하게 쌓인 박스를 좋아하기 위해 자신의 미적 감각을 왜곡하기에 이른 것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인지 부조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에서 설명하기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선택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지닌 생각과 행동, 어떠한 태도나 의견과 같은 요소들이 일치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만약 일치되지 않을 때는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는 요소를 바꿔 일치되도록 한다. 인지 부조화 이론은 이솝 우화 중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로 흔히 설명되어 왔다. 포도를 먹고 싶다는 '생각 또는 의견'과 포도를 따지 못하는 '행동'이 일치되지 않은 여우를 볼 수 있다. 포도를 따지 못하는 행동은 여우의 노력으로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포도를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왜곡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라서 먹어도 맛없을 거야!"
나의 경우, 엉성한 박스 책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태도'와 실제 박스 책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행동'이 일치되지 않았다. 그러면 태도 혹은 행동을 바꿔야 하는데, 행동을 바꾸려면 새 책장을 구입하거나 유튜브에서 봤던, 외견상으로 훌륭한 책장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돈을 쓰고 노력하기보다는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게 훨씬 수월하다. 실제로 박스 책장이 필요 없을 만큼 새 책장을 살 수 있는 지금도 3칸짜리 책장 하나만 주문하고 박스들은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미 '태도와 행동의 불일치'는 해소가 된 것이다.
인지 부조화는 쉽게 말해 '자기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방어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선택이 맞다고 믿고 싶다는 건, 다시 말해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는 의미이다. 나의 선택은 나 자신을 대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선택이 나를 대표하기도 한다면, '나'를 알기 위한 단서 중 하나로 '나의 선택'을 살펴볼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주로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파악해보는 걸 통해 무엇을 선호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책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영화화가 이루어진 책이라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글자로만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생동감 있고 이야기를 이해하는 게 수월하다고 생각한다. 이모저모 따져보면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한다기보다는 '책 사기'를 좋아한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나의 어떤 모습을 나타내는 걸까?
책 이외에도 사고 모으는 게 있는지 살펴보자. 한 마디로 말하면 사는 건 그다지 없다. 그러나 모으는 건 '거의 모든 것'이 해당한다. 나는 '저장 강박'을 지니고 있다. 정말 쓰레기가 아닌 이상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는 어떤 것을 쓰레기로 분류하는 기준도 다르다. 택배물을 보호하는 에어캡, 일명 뽁뽁이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보관한다. 봉지형이 아닌 상자형 과자를 먹고서도 빈 과자 상자를 보관하곤 한다. 오염된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물건들이 내 소중한 추억의 일부이기 때문에 버리지 못한다. 양쪽 모두 고장 난 이어폰부터 다 쓴 건전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추억'이라는 명분으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내 것'에 굉장한 집착이 있다. 지금은 예전보다 집착을 많이 놓긴 했으나 여전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집착이 강한 편이다. 내 물건은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물건보다는 '내 시간'이나 '내 사람'에 더 집중한다. 내가 약해서 내 것을 뺏겼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아마 큰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타고난 기질도 아마 욕심이 많은 편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책'을 유독 많이 사모으는 걸까? 일단 책을 많이 읽기 위해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독서모임에 참여하게 된 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번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선정된 책을 구입하는 것만으로 매달 두 권씩 부지런히 사게 된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기도 하지만, 그 책이 맘에 들면 결국 사게 된다. 나는 여러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사야 하는, 사고 싶은 책이 점점 늘어났다.
책을 사는 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집 활동이기도 하다. 장난감을 사모은다거나 옷을 사모으는 게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책을 모으는 것과 비교하면 비판적인 시선이 많다는 건 사실이다. 책을 모으는 행동에 대해서도 비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읽어야 도움이 되지 사기만 하면 의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지만 책을 사는 건 분명 '좋게' 보인다.
'책 사기'라는 행동, 그리고 이 행동을 하기로 선택한 건, 내가 가진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내 걸 지키고 싶은 욕구'를 나타내 준다고 볼 수 있겠다.
여러분들이 자주 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좋다. "혹시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있어?" 또는 "나에 대해서 '남들과는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어?"라고 물어보자. 여러분들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걸 알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