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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Jul 24. 2021

선택적 예민 보스

내가 가진 예민함에 대한 생각

나는 예민한가, 둔감한가?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내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나는 한 마디로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별로 울지도 않고, 말썽 피우지도 않고, 거부하거나 투정 부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있어 나는 결코 예민한 아이가 아니다. 나의 어머니께선 한없이 잔잔한 순둥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단지 예민함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어린 나는 예민함을 죄악으로 여겼다. 울면 안 된다. 짜증 내선 안 된다. 투정 부려선 안 된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이 믿음들이, 나의 예민함을 봉인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늘 바쁜 어머니로부터 미움받지 않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이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이해한 것과 별개로, 나는 여전히 예민함을 감추고 살고 있다.


  나는 모든 일에 예민하진 않다. 내가 지독하게 예민한 몇 가지 특정 포인트가 있다. 그 외의 영역에선 한없이 둔감하다. 또는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나의 예민함 포인트는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건드려지지 않는 것들이다. 이러한 행운이 나를 도와줬기 때문에,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얌전하고 둥글둥글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예민 포인트를 짚어보자.


1. 머리 만지지 마!


  나는 타인이 내 머리를 건드리는 걸 싫어한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그냥 툭 치는 것도. 극도로 예민하던 시절에는 머리에 붙은 걸 떼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그냥 붙어있다는 걸 알려만 달라고 말했다. 내가 거울보고 뗄 테니까. 지금은 예전보다는 참을성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대신 떼어주기를 부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목적 없이 내 머리를 터치하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어머니와 여자친구에게만 허용된다.


  나의 '머리 만지기'를 싫어하는 마음에는 '자존심'이 숨어 있다. 우리는 윗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다. 친구라고 할지라도 리더 격인 사람이나 조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의 머리는 건드리지 않는다. 즉, 머리를 편하게 건드릴 수 있다는 건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조심스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반항적이었던 청소년기에는 이를 '쉽게 보는 것' 또는 '만만하게 보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한 마디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치 급소를 숨기는 동물처럼 반사적으로 방어 행동을 취하게 됐다.


  지금은 머리를 만지는 게 무시하는 행동이 아닐 때도 있다는 걸 안다. 특히 위에서 말했던 '목적 있는' 터치일 때 그렇다. 하지만 머리가 다른 사람에게 만져졌을 때의 스트레스까지 없애진 못했다. 심지어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정리할 때조차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눈을 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어머니와 여자친구의 '쓰다듬기'는 애정표현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2.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내 방은 나만의 고유영역이다. 내 물건이 있는 곳이며, 내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곳이다. 즉, 나에게 있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동시에 가장 약해진 상태로 지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쉽사리 들여선 안 되는 곳이다. 내 방에 들어오길 허락한다는 건 내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다. 마음 깊이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내 방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친형도 입장 불가였다. 지금은 출입증을 건네줬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 방에 들어온 사람 중 가족이 아닌 사람은 세 명이다. 두 명의 친구와, 여자친구. 아마 평생 동안 열 명이 채워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걸 싫어한다. 왜냐하면 누군가 내 물건을 만지는 것조차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물건인데 어째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거지?"라는 느낌이라고 설명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어릴 적 내 물건을 뺏겼던 경험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뺏긴 물건이 다시 되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한 번 다른 사람에게 내어준 물건은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게 내가 얻은 교훈이었다. 그래서 꽁꽁 숨겨두고, 다른 사람들이 만질 수 없게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물건일수록 더욱 보안에 신경 썼다. 내가 허락한 몇 사람을 제외하곤 그러한 물건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내 것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내 방은 나만의 영역인 만큼 내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다. 내 방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유로우며, 가치 있는 행위이다. 가장 나답게 지낼 수 있는 곳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고 당당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100%, 모든 걸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나는 자존감이 높지도 않고 당당할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인지라 더욱 나를 숨겨야 안심된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내 방을 철저히 지켜낼 것이다.




예민함도 개성이다


  위의 두 가지 말고도 나의 예민 포인트는 더 있다. 그중 위의 두 가지가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뺏기지 않기 위해 생겨난 무의식적 방어 시스템이다. 지금은 의식하여 조절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청소년기의 나에겐 필요한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고 없어도 되는 전략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훨씬 더 예민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마 내 글을 읽으며 "겨우 이 정도로 예민하다고?"라고 생각할 수 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일 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민함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개성이다.


  개성이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예민함은 아직까지 존중받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정 없다'라는 말로 예민함을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내가 정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가 예의 없는 건 줄도 모르고 쉽게 말한다. 예민함은 지켜야 하는 선을 분명히 보여주는 심리적 특성이다.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현실과 맞지 않을 만큼 왜곡된 예민함을 지닌 게 아닌 이상, 누구나 어느 정도 예민할 필요가 있다. 예민함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어 시스템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명서와도 같다. 나처럼 특정 부분에서만 예민한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선, 이 특정 선만 지키면 된다. 공략법이 매우 간단하다. 오히려 예민한 부분이 없는 사람이 더 까다롭다. 이런 사람은 누구와도 가까워지지만,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내가 가진 예민함을 존중하기로 했다. 바라보기에 따라선 예민함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모습'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무의식적인 특징이다. 내 영혼과 맞닿아있고, 내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어쩌면 예민함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존중해야 할 개인 특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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