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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부K Dec 06. 2023

왕비를 질투할 것인가

똑부K네 회사 이야기 ep 3

똑부K네 회사 이야기


허 프로가 판교의 모 유명 A스타트업에서 전략담당 여성임원으로 입사한 첫 주, 재무담당 임원 장 프로는 허 프로를 따로 조용히 불렀다. 일종의 상견례 같은 티타임 속 그는 '어렵게 스카우트한 허 프로와 이곳에서 잘 일해보고 싶다, 힘들겠지만 법무담당 여성임원 신 프로와 잘 지내달라'는 부탁을 곁들였다.


대표도 아니고 법무담당과의 관계를 부탁한다고? 속으로 좀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새로운 회사에 열심히 적응해 가던 중, 의아한 사건 2개가 연이어 생겼다.


#1 동갑내기 사업담당 여성임원 김 프로가 퇴사를 한단다. 그것도 암에 걸려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경력도 실적도 그리 검증되지 않은 주니어 임 프로가 내부의 거센 반대 여론에도 불구,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2 암으로 퇴사한다던 김 프로가 C사에서 건강히 잘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두어 달 후 들렸다. 암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긴 한데, 암이라고 말하면서까지 회사를 그만두었다니! 내가 맞게 이직을 한 건가 허 프로의 마음이 복잡하다.


그런데 복잡한 마음의 허 프로에게 박 프로가 말한다. 2개의 사건이 모두 법무담당 신 프로와 관련이 있다는 거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 왕비를 질투할 것인가, 모실 것인가


판교의 많은 기업이 그러하듯 A스타트업도 대외적으로 수평적이고 합리적인 조직 문화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칭도 대표부터 말단까지 모두 '프로'이고, 대표를 제외하면 별도의 임원석이나 팀장석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많은 스타트업은 냉정하게 1인 사주 혹인 1인 대주주가 소유한 중소기업이다. VC나 PE주주들이 물론 있긴 하나 사실상 절대왕정에 가깝다. 즉 대표는 왕이다. 그리고 궁궐엔 왕비도 후궁도 궁녀도 있다.


법무임원 신 프로는 로스쿨 졸업 후 창업 초기부터 A스타트업에서 수년간 대표 곁을 지켰다. 듣기론 대표가 개인적으로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을 때 가족보다 더 애쓰면서 둘의 관계가 더 두터워졌다고 한다. 속칭 타고난 여왕벌 신 프로는 여자 임원들과의 관계를 특히 중요하게 관리했는데 궁궐 내명부가 품계에 따라 위계서열이 차례로 정리되듯, 여자 임원들의 위계서열을 본능적으로 정렬했다.


퇴사한 김 프로와 후임자 임 프로는 여왕벌 신 프로에 대한 처세법이 달랐다. 그리고 원래 서열은 갈등이 있을 때 명확해다.


IB와 컨설팅펌 출신이었던 김 프로는 법무담당 신 프로를 왕비로 모실 생각이 1도 없었다. 사실 언제 적 변호사 라이선스? 그것도 김앤장도 아니고 나이도 나보다 어린 사내변호사잖아?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본디 사람의 생각은 숨겨도 티가 나기 때문일까, 김 프로와 신 프로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신 프로는 대놓고 김 프로의 모든 일에 딴지를 걸었 김 프로는 절대 신 프로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 프로가 맡고 있던 사업의 광고 예산이 신 프로가 대표와 미팅을 가진 후 전면 재검토가 떨어졌다. 법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광고였지만, 둘의 갈등 상황에서 대표는 신 프로의 손을 들어주며 김 프로에게 앞으로 신 프로의 합의결재를 받아서 광고를 진행하라고 했다. 김 프로는 너무 열받지만 또 너무 창피해서 당장 그만두고 싶었고 에라 모르겠다 암을 외치며 퇴사를 감행한 것이다.


| 궁녀의 본분을 지켜 왕비를 모시다


반면 경력도 이력도 내세울 것 없는 주니어 임 프로는 우연한 기회에 소속 팀장의 퇴사로 팀장 업무를 대신하며 법무담당 신 프로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주니어로 A스타트업에서 1년간 구르며 임 프로는 신 프로의 위치도 자신의 위치도 잘 알았다. 시리즈 C 투자유치 후 회사에는 경력과 이력이 좋은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창업 멤버도 아닌 자신은 왕비 아래 후궁 아래 궁녀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 프로는 대표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신 프로를 은근히 조직 구성원들 사이에서 유능하고 리더십 있는 이미지로 높여주며 신 프로를 극진히 챙겼다. 자신의 위치에 맞는 본분을 지켜 법무담당 신 프로를 극진히 대우하는 게 더 안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임 프로는 임원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임 프로가 일까지 잘하진 못했다. 10억이 넘는 예산으로 추진한 광고는 성과 없이 망했고 소속 조직원들은 임 프로의 능력에 반기를 들며 퇴사를 했고, 후광고캠페인에서 다시 10억을 성과 없이 날렸다. 그래도 임 프로는 건재하다.  대표가 아닌 신 프로의 보호 덕분에.


다행히, A스타트업도 아직은 대외적으론 건재하다. 두 달 안에 투자유치에 실패하면 곧 정리해고가 예견되어 있다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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