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랜트연구소 Dec 19. 2023

앞뒤가 달랐던 녀석_필레아페페

플랜트랩 연구대상 (3)

필레아페페와의 첫 만남은 좋아하는 꽃집에서였다.

원에 가까운 동그란, 밝고 경쾌한 초록색 잎들이 360도 방향으로 사이좋게 나 있는, 조형미가 아름다운 귀여운 식물이었다.



처음 페페와 만났을 때는 내가 한창 살식마로 이름을 떨치던 시기라서, 다음에 꽃집 왔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안 팔렸으면 사야지? 하며 간신히 입양 욕구를 잠재우며 기다렸던 친구였다.


결국 그 친구는 다른 주인을 만나 입양된 건지 어느 순간 꽃집에서 보이지 않았고, 나도 서서히 페페를 잊게 되었다.




하지만 취향은 어디 가지 않는 걸까?

한참뒤 화원투어를 갔을 때 귀여운 페페를 발견하고 덥석 데려왔다.


그렇게 나의 페페는 플랜트랩으로 이송되었다.




잎도 동글동글하고 도톰하니 딱 봐도 순둥이임을 직감했다. 적당한 햇빛, 그리고 적당한 물 주기, 작은 바람을 쐬어주니 페페는 금세 우리 집에 적응해서 작은 자구를 키워주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페페는 자구를 많이 생산하는 친구로, 자구 분리는 자구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진행하는 것이 자구 생존의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엄마에게 플랜트랩 새로운 입주자를 소개해드렸는데 저기 동그란 친구는 뭐냐며 페페에 관심을 가지셨다. 마침 자구도 잘 크고 있던 시기라 자구 분리하면 엄마께 입양시켜 드리기로 약속했다.


엄마께 선물해드린 페페 자구





페페는 예상했던 대로 키워보니 순둥이였다.

뭐 하나 걱정시키는 부분 없이 새 잎도 잘 내어주고, 물을 언제 줘야 하는지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배려있는 친구였다.


그래도 벌레의 습격으로부터 강해 보이는 친구는 아니었어서 나름 잘 지켜봐 주기로 했다.

잎의 앞과 뒤를 꼼꼼히 살펴보는 중, 잎의 뒤에 하얗고 동그란 점 같은 벌레 같은 것이 엄청나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제대로 볼 용기가 안나 남편에게 대신 봐달라고 요청했다.

남편이 하얀 게 뜯어지지 않은걸 보니 벌레는 아닌 거 같다며 나를 안심시켰고, 바로 페페 잎 뒷면에 대한 검색에 들어갔다.


나의 페페는 벌레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하얀 벌레의 정체는 바로 페페가 숨 쉬는 기공이었던 것.




모든 식물에는 기공이 있지만 페페의 기공은 유독 다른 식물보다 커서 육안으로 관찰이 가능한 상태였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세포벽과 같은 한 구역구역마다 기공이 하나씩 자리 잡은 듯한 형태였다.



어떻게 이렇게 두드러지게 기공이 잘 보일 수 있었던걸지. 페페의 조상과 페페의 진화과정까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찾아보니 아스파라거스 메이리 뿌리처럼, 페페기공으로 나처럼 적잖이 놀란 집사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앞은 매끈하고 귀여운 잎이었지만

뒤는 상상도 못 할 모습의 기공이 다글다글 했던 (조금은 징그러운)

앞뒤가 달랐던 녀석.


하지만 나는 페페를 계속 사랑해 줄 것이다.

앞뒤가 달랐지만 일부러 나에게 뒤를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닐 거니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미안하지만 너의 뿌리는 공포였어_아스파라거스 메이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