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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pr 18. 2024

<언어의 무게>와 글: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 꿈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즐겁게 하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올바른 언어를 찾는 일이었네. (중략)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언어와 함께 보내리라는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네.  

/219쪽



이렇게까지 비장한 마음을 먹은 적은 없다. 그래도, 이재명이 경기도지사로서 '기본소득'에 대해 설명하면서 "세상 사람들 중에는요, 나한테 매달 100만 원만 나오면 그냥 들꽃 구경이나 하고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일주일에 세 번만 길거리 공연 하면서, 이런 사람 있어요. 생산성은 낮지만 삶의 만족도가 높은 일자리들이 있습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깊이 동의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럼 나는 글을 쓰겠지, 하고.



글을 쓰는 마음,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조차도, 하나의 마음이 아니다. 어느 때에는 글쓰기가 (적어도 나에겐) 최고선 같고, 어느 때엔 세상 쓸데없이 시간을 쓰며 나를 괴롭히는 일 같다. 양 끝 사이에서 나 혼자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난상토론을 하루에도 몇 번씩 펼쳤다, 소득 없이 접는 일이 많았다. 2019년부터 3년 동안 글쓰기 모임에서 에세이와 리뷰와 소설을 쓰면서, 3년 전부터 지난해까지 작가교육원에서 드라마 대본을 쓰면서, 그리고 6개월 전 브런치에서 뭐가 됐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후회 없이 글을 써보자고 지금까지 달려오면서. 때마다 밀물처럼 내게 밀려와 무언가 내 앞에 쏟아놓고 또 무언가는 내게서 빨아들이며 썰물처럼 잦아드는 꿈 같은 것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채로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다.



그간, 답 없는 물음들과 무엇을 향하는지 모를 하소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들뜸,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들을 일기에 토로하기도 하고, 남편이나 글쓰기 친구들에게 말해보기도 하였으나, 내가 떠내고 싶은 깊이까지 닿은 적은 거의 없었다. 사실은 나도 정확히 하려는 말이 뭔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 글을 쓴다는 일이, 그 의미가 더욱 낯설어졌고, 그러니 차라리 놓아버려야 한다는 생각과 이게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끝까지 더 해야 한다는 생각, 그 둘 사이에 매달려, 관객 없는 곳에서 서커스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흥에 겨워 글을 써나가고, 글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그리고 글 쓰는 나와 글 쓰는 삶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모래성처럼 쌓았다가 흐트러뜨렸다가 했다. 결론에 이른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금방 아무 소용이 없어져서 내 눈앞의 하얀 종이만 착실히 채워나가자고 나를 달래는 날이 많았다.



이런 고민을 하고 하고 또 하다 보니 일면 나아가는 것도 같았지만, 미로 속에 갇힌 양 왔던 곳에 또 와서 망연해지면, 내 모든 욕망과 꿈은 체념이 바탕이구나, 깨닫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체념 속에서 적극적으로 허우적대며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길 기대했는데, 그게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라 내심 놀라면서도,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그러다 이 책을, 언어를 만난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들은 적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던 말들, 내가 질문으로도 자아내기 힘들었던 말들, 흐릿하고 모호하고 뒤엉켜 있지만 분명 내 안에서 빳빳이 존재하던 말들.



가령 이런 말들.



처음 몇 년 동안은 출간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대하소설 속 세계를 만들어갈 뿐이었지요. (중략) 최근에는 누군가 이걸 읽고 이야기를 한다면 어떨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낯설지만 자꾸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이따금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길 바라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날 알아보고 인정해주길 원하나?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내 내면의 장면에 열중하려고 1000쪽이 넘는 책을 읽을 시간을 정말로 낼까? 누군가 정말 그렇게 한다고 가정해보죠. 그의 내면에는 새로운 장면이 흐르겠죠. 내가 그걸 알고 싶어할까요? 아니라는 게 솔직한 대답이 될 거예요. 그렇다면 왜 출간해야 할까요? (중략) 얼마 전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아마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라고 말이지요. 그게 훌륭한 이유가 될까요?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틀립니다. 어딘가에 초대를 받아 다녀온 후에는 한밤중에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 글을 쓰지요. 내가 혼자라는 것, 내 안의 장면들과 홀로 있다는 걸 즐기기 위해서요.  

/413-414쪽



그리고 이런 말들.



난 그 모든 책과 더불어, 그 책들을 통해 살아왔어.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가 낯선 사람들과 관계가 있나? 대성당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전혀 모르겠더군. 특히 사실을 다루는 소설에서의 언어는 가장 은밀한 것이지. 그런데 이걸 공개한다는 건 정신 나간 생각 아닐까? 제정신인가?

/570쪽



또 이런 말들.



결국 나를 망설이게 하는 문제는 호평이나 혹평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 이 이야기와 나에게 닿는 걸 내가 원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곧 이 이야기니까요. 내가 그걸 썼고, 오랫동안 쓰면서 그 이야기를 통해 내 삶을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게 결국은 중요한 게 아닐까요?  

/346쪽



한편으로 이런 말들.



뭔가에 대항하여 언어로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감정이었다. 정당방위로서의 글쓰기.  

/160쪽



그러다 이런 말들.



내가 실제로 당신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아마 있겠지. 당연히 예전과는 다른 점도 있어. 당신이 나에게 대답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이건 일방적인 말하기야. 그럼에도 크게 말하든 속으로 말하든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는 달라. 다른 점 가운데 한 가지는 글로 쓴 생각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점이지.
나는 이제 그 생각들을 그냥 실행에 옮기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숙고하며 거리를 두고 마주할 수 있어. 생각들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고, 나는 언제나 그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지. 글씨로 표현됨으로써 생각은 예전에 조용하고 일시적인 정신의 일화일 때는 갖지 못했던 확실성을 얻게 돼. 이 확실성을 통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 생각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배우지.
일기를 쓸 때도 그렇지 않아? 그때도 정신의 내용이 명백해지고 거기에 집중하는데, 이는 언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잖아. 자기 언어의 독자인 자기 자신만을 대상으로 삼고서 말이야.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쓸 때는 일기와 어떻게 다를까? 당신에게 내 생각을 알리고 그걸 당신의 정신에 비춰보고 싶다는 욕구가 차이점이지. 그게 추측이고 말없는 반영이긴 하지만 말이야. 나 혼자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위해 서술하는 데는-그게 생각에 불과하더라도- 큰 차이가 있어.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그저 묘사만 하는 생각이라고 해도 타인의 정신을 위해 내 생각과 감정을 열어 보이고 그에게 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되지. 게다가 그게 다른 누군가의 정신이 아니라 당신의 정신이라면. 내가 당신에게 쓰는 글은 내가 아는 당신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욕구를 따르게 될 거야.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상상하는 당신의 기대와 성찰과 감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겠지. 침묵하는 당신의 판결은 내가 설령 그걸 벗어나더라도 항상 나에게 척도가 될 거야.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더라도 언제나 우리 둘의 대화가 이루어질 테지. 당신의 말이 더는 나에게 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대화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거야.

/162-163쪽



돌아와 이런 말들.



나는 비평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더 깊은 저항감을 느꼈어. 어떤 반응과 씨름해야 한다는 불쾌감이지. 그게 설령 호평이라 해도. (중략) 내 책에 대해서 누군가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불편했고, 속으로는 당황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나 스스로 인정했지. (중략) 내 원고가 이제 공공의 것이 되어 사람들의 대화 소재가 되니 마치 원고를 빼앗긴 것 같았지. 그게 칭찬이라 하더라도. 사실 이 모든 걸 나를 위해, 오로지 나만을 위해 썼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발견은 매혹적이었어. 책을 쓸 때는 인생의 오랜 시간을 원고와 함께하고, 그러는 동안은 책을 통해 사는 삶이고, 쓰는 행위는 삶의 실질적인 활기야. 내 책을 진열창에서 볼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하려고 했어. 자부심이었나 불안감이었나? 자부심이었다면, 그게 꼭 필요한 감정이라고 간주해서 무거운 중압감이 되지 않았던 걸까? 기차에서 내 책을 읽는 누군가를 봤을 때 불편하지 않았던가? 낯설었나? (중략) 하지만 키아라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내가 정말 알고 싶은가? 키아라의 경험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있긴 할까? '내가 겪은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중요한가? 편지에도 썼듯이 당신은 관심이 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402쪽



그러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고, 그 행위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글을 쓰며 사는 시간과 글을 쓰는 데 사용하는 에너지에 대해 해석할 줄을 몰라서, 혹은 이름을 붙여줄 수 없어서 헤맨 게 아닐까. 만약 내가 쓴 글로 유명해지기라도 하면, 돈을 벌기라도 하면, 어떤 식으로든 인정을 받기라도 하면 답이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내가 원했던가? 그게 필요한가? 도움이 되나? 오히려 독은 아닌가? 아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 앞에서 김칫국을 시원하게 마시고 거창하게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인가? 포도를 보며 시다며 침으로 한강물이라도 만들 심산인가?



내친김에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노래하며 사는 삶은 다음 네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1. 평생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노래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 다른 게 아니라 노래하는 게 좋은 거니까.

2. 평생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노래하고, 남기기는 한다. : 좋아하는 건 노래하는 거고 그 외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내 노래가 나와 함께 사라지는 대신 세상에 남았으면 하니까. 내가 세상에 없을 때 남이 듣거나 말거나.

3. 타인이 들을 수 있게 노래하고 남기기도 한다. : 내가 좋아하는 건 노래하는 거지만, 누가 들어서 좋아하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니까.

4. 더 많은 타인이 듣도록 일부러 광장에서 노래하고, 할 수 있는 한 여러 기회를 만든다. :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노래란 아무래도 듣는 사람이 있을 때 의미 있는 거니까, 많은 사람들이 듣고 좋아해주길 바라는 건 당연한 거니까.



노래라는 게, 그냥 부르고 혼자만 듣는 즐거움으로 과연 완결되는 즐거움인가? 아니면 당연히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그전에 듣는 사람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즐거움인가? 그러니까 글이라는 게, 읽는 사람이 없어도 쓰는 것으로 완결되는 무엇인가? 당연히 독자가 필요하고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나는 전자(1번) 같기도 하고, 후자(4번) 같기도 해서, 적당히 그사이(2,3번)에서 머무르며 좋은 글이나 일단 쓰고 보자고 타협하곤 했다.



그러다 내 예상과 다른 반응에 피곤해질 때면, 전자나 후자로 확 기울어져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내 글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내 글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더 영리하고 더 부지런히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그동안 내가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다. 아니면 이미 미친 건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언어의 무게>에 나오는 가상의 작가들의 조금씩은 다른 마음들을 보며, 여전히 명확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그러니까 그들을 만들어낸 진짜 작가(파스칼 메르시어)와 아마도 그가 아는 실제의 작가들도 이런 약간은 미친 것 같은 수준의 생각들을 한다는 걸 알았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며 사는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고 글을 쓰는 데 에너지를 몽땅 써도 하나도 힘들지 않은 것만큼이나, 나를 이토록 미치게 만들 것 같은 생각들 속에서... 아무래도 괴롭지 않다는 걸, 실은 재밌고 즐겁기까지 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기본소득 사회가 오기 전이라도... 글을 쓰며 살아야겠지,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을 가지고 낯선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내 마음을 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일단, 지난 반년 동안 '쓰고 죽어야겠다' 생각한 것들은 얼추 썼으니, 헤매며 나를 달래기보다는 이렇게 살아볼까 한다.



지금 나는 (중략)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일을 즐기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아. 결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생활.

/464쪽



그래도 되는, 내 (물리적, 심리적) 여건에 감사하며. 이건 내게 허락된 복이니까. 이 정도는 품어도 될 꿈이니까.




이전 19화 <언어의 무게>: 느리고 낮은 리듬으로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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