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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pr 15. 2024

<언어의 무게>: 느리고 낮은 리듬으로 끝까지 간다

이 소설이 좋을 거라는 '신뢰' 없이는 절대로, 영원히.

이렇게 예리하고, 표면 아래에 뭐가 있는지 이렇듯 정확하게 알아채는 사람을 내가 또 알고 있었던가?  

/177쪽




0. 

20대에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었다. 그때는 중간에 책을 던질 줄 몰라서 꾸역꾸역 읽고는, '역시 유명하다고 좋은 책이 아냐. 베스트셀러라고 다 사면 안 돼.' 그렇게 이를 갈았던 생각이 난다. 중년 백인 남자의 뭐라고 뭐라고 하는 지루한 이야기, 도저히 읽히지 않는 책이라고 남았고, 그 외에는 아무 기억이 없다.


재작년 유튜버 '밀라논나'가 마지막 영상에서 책 <삶의 격>을 추천했다. '할머니는 참 자존감이 높은 것 같다는 댓글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굉장히 많이 배웠다'고, '읽고 읽고 또 읽은 책'이라며 '내 격을 지키면서, 주변 하고도 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생존하는 방법'이 쓰여 있다고 했다. (아니, 그런 좋은 책이 세상에 있었어?)


당장 주문해서 책을 펼쳤는데... 5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뭐, 대놓고 철학책이니까, 진지하고 깊은 내용이니까, 라고 꾹 참기에는, 흘려 들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라는 말이 걸렸다. 고민 없이 책을 덮고, 이 사람 책은 나와 맞지 않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 거야, 혼잣말하며 큰일날 뻔했다는 듯이 책장 깊이, 마음속 깊이 책을 넣어두었다.


그랬는데, 같은 작가, 그러니까 파스칼 메르시어이기도 하고 페터 비에리이기도 한 그 작가의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 <언어의 무게>를 손에 들게 됐다. '세상 모든 콘텐츠 중 나의 원픽'을 공유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한 분이 <언어의 무게>를 꼽은 것이다. 시작부터 좌절스러운 마음이었지만, 숙제는 숙제니까, 다시 한번 꾸역꾸역 읽기 시작... 했으나, 역시 별로였다. 읽히지가 않았다.




1.

아마도 선거철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정치 과몰입 상태였다). 150쪽 즈음에서 이 진지하고 지루한 아저씨에게 이번에도 항복할까 하다, 선거 결과가 준 희망과 의욕으로 하는 데까지 해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쓰는 일'도 아니고 '읽는 일'이야 억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마음가짐의 문제인지, 그쯤부터 원래 재미있어지는 건지, 선거가 끝났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서서히 읽히기 시작했다. 빠져들었고, 줄을 긋는 일이 많아졌다. 읽기를 멈추고, 문장을 음미하는 일도.


3일 만에, 조금 무리해서, 나머지를 다 읽었다.




2.

주인공 레이랜드는 오만 가지 언어를 아는 번역가이자 출판사 사장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10여 년 전 죽었고, 장성한 딸과 아들이 있다. 어느 날 심한 발작으로 병원에 실려가 뇌 사진을 찍었는데, 몇 달 안에 죽을병(뇌종양)으로 진단받는다. 그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냥 단순한 편두통 발작이고 실수로 사진이 바뀌었다는 사정을 7주 후에 알게 된다.


그사이 레이랜드는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출판사를 팔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생생하고, 삶에 대해 이전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유도, 분노도, 미지의 것도 많아졌다.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준 집으로 가면서, 그러니까 출판사가 있던 이탈리아에서 모국인 영국으로 가서 지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소설의 내용이다.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삶을 돌아보고, 출판사와 관계를 재설정하고, 사람들을 새롭게 만나 영향을 주고받고, 끝내 삼촌의 바람이자 자신의 구원이 되어줄 '자신만의 언어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3.

줄거리는 딱히 스포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이 소설이 서사 위주로 휙휙 넘어가는 이야기도 아니다.



네가 이렇듯 뜨겁고 정신 나간 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바탕이 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불태워서 너 자신의 단어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펜을 잡길 바란다. 회고록 형식도 괜찮겠지만, 이야기 형식이 더 좋겠지. 내면 가장 깊은 것을 주인공이 촘촘한 시적 형태로 경험할 수 있으니까.

/46-47



삼촌의 유언은 이 소설 자체에 대한 은유다.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회고록이 아닌 소설 형식을 빌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인물 본성에 대한 묘사, 처한 상황에 대한 구체성 덕에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등장인물에게 매력도 느끼고 그들의 삶과 말에 공감도 된다.


하지만, 확실히 이 모든 이야기에, 벌어지는 사건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다치는 일은 없다. 안타깝고 절절해지고 몸이 닳거나 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 아니 작가의 목소리라고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소설의 단점일 수 있겠는데, 놀랍게도 이 소설의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인공처럼 나도 독자로서, '내면 가장 깊은 것'을 '촘촘한 시적 형태로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4.

'내면 가장 깊은 것'을 '촘촘한 시적 형태로 경험'했다니.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관념적으로, 느리고 낮은 리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간다. 그 리듬을 타기란,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좋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쉬울 것 같지 않다.


죽음과 삶, 언어와 글쓰기를 거대한 축으로 일, 직업윤리, 관대함, 불안, 삶을 바꾸는 선택과 변화, 그리고 친밀함과 우정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시정(詩情)'으로 표현한 '현재를 온전히, 충만하게 사는 삶'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제목부터 플롯, 소재와 주제, 캐릭터와 문체까지, 감각적으로 끌리는 게 하나도 없다. (심지어 빈 줄도 거의 없어서, 629쪽 내내 시각적으로도, 아주 그냥 촘촘하다.) 이 책이 좋을 거라는 '신뢰' 없이는 절대로 읽어낼 수 없는 (더구나 나로서는 영원히 시작도 하지 않았을) 책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관심사와 취향 때문이든, 혹은 어쩌다 타게 된 리듬 때문이든, 그 안에 일단 들어가면, 문장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사유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을 떠돌던, 나를 휩쌌던 의문과 불편함과 고민의 파편들을 척, 척 길어올린다. 내 안에서도 흐릿했던, 그래서 타인을 통해 이토록 정제된 언어와 문장으로 비추어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유들.


그것을 만난 것은, 그 즐거움은, 희박한 확률의 희열임을 알고 있었다. 또 그 한가운데서, 어쨌든 나는 그동안, 살고 있었구나, 애쓰면서 혹은 뭐가 됐든 어떻게 되어가든 지켜보면서, 살고 있었어, 하는 알 수 없는 종류의 안도를 맛보았다.


그런 면에서, 소설로서 특히 이 시대 이야기로서의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은 책이었다고 경이를 담아 남긴다.




5.

책을 덮고 나서 두 가지 화두에 대해 생각이 이어졌다. 하나는 죽음, 하나는 글쓰기. 구체적으로는 스스로 혹은 도움을 받아 삶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 그리고 글을 쓰는 마음과 기대에 대해.


전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후자는 다음 글에 쓰겠다.


이 소설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체적 장애와 고통 때문에 자신으로서 온전히 살 수 없을 때)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이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조력자살을 옹호한다. 솔직히 나 역시 이 입장에 매우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엔 그냥 반가웠다. 하지만 비슷하게 반복되는 사건과 역시 비슷하게 펼쳐지는 논의를 보며, 오히려 이 입장 쪽의 강력하고 조밀한 논거와 주장에 어쩐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그러니까 이 주제는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가치가 얽혀 있는, 너무나 복잡한 문제여서, 절대로 매끈하고 깔끔하게, 쉽게 한쪽으로 결론 지을 수 없다는 걸 나 역시 깊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동안 굳건하게 자리 잡은 ('생명은 존엄하다', '삶을 끝낼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와 같은) 가치와 규범이, 의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가치관 등의 변화로 여기저기 균열이 생기고 흐트러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타협 없이 버티는 형국에 한숨이 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말 그대로 목숨은 붙어 있지만, 내 몸을 의지대로 할 수 없고 살아있는 게 고통일 때, 이 상황이 달라지리란 실제적인 희망이 전혀 없을 때, 그때도 인간은 살아야 하는가?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비참할 뿐인 삶일 때 '죽음'은 선택할 수 없는가?

-그 행위를 물리적으로 본인이 할 수 없을 때, 타인이 돕는다면 '죄'가 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소설은 모두 '아니'라고 확실히 말한다. 나는 차례로, '모르겠다/아니, 선택할 수 있다/아닌 것 같다' 정도의 마음이었다. 두 번째도 '나라면 선택하고 싶다'가 정확하겠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 혹은 우리 현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와 상관없이, 시작점에서 이미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삶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인가, 아닌가? 내 것인가, 아닌가?


여기서 시작되는 문제가 아닐까? 삶이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혹은 주어졌더라도 분명히 내 것이라면, 어떻게 살든, 죽음을 선택하든 말든 남이 (국가라 한들)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본인이 죽음을 선택한다면, 도와주면 안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런데 나는... 삶이, 생명이 주어진 것 같다. 받은 것이라,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너무 오래, 진심으로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던 탓일까?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확실히, 내 삶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도, 내가 값을 주고 산 것도 아니니까. 내가 사는 동안 어떤 선택을 할 자유가 있고 그 결과와 책임을 내가 감당한다는 점에서 내 삶의 주인은 나인 것 같지만, 이것을 처분할, 끝낼 권한까지도 내게 있는 것인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두렵다. 나의 정신적/육체적 장애나 불능, 고통으로 인해 나 스스로 비참하지 않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괴롭지 않게, 내 삶의 마무리를 내 손으로 되도록 깔끔하게 짓고 싶은 소망이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질문, 죽고 싶은 타인을 죽이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그 행위자를 처벌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소설 속 화자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죄로 여기고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이 난센스 같았다. 영화 <아무르>와 비슷하다. 누가 주인공 조르주 할아버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이야기가 펼쳐질수록 안느와 조르주에게 깊이 공감하고, 마지막 선택에 가슴이 무거워진다. 박수를 보낼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잘못을 따져서 처벌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조르주와 달리, 배우자를 죽이고 바로 자살하는 데 실패하면서 재판정에 서고 처벌받는다. 그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작가는 소설 속에서 여러 목소리를 빌어 여러 번 강조하는데, 가만 생각하면, '정당성'보다 더 중요한 건, '그들이 그 행위를 하며 얼마나 괴로워했는지'였던 것 같다. 실제로, 주장의 강조점도 거기에 있었고.


그러니까, 한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하길 원할 때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물론 (육체적/정신적으로 편안해진다는 점에서) 본인이 행복해지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 배우자의 고통을 없애주고 싶었기 때문에, 죽이는 행위 자체와 배우자의 부재가 본인도 죽고 싶을 만큼(실제로 자살을 시도했고, 감옥에서 풀려난 후 자살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인데도 죽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이야기다.  


만약, 누군가 '본인이 죽고 싶어하니까 죽인 거야'라고 고민이나 슬픔, 괴로움의 흔적 없이 '죽이는 행위'를 했다면, 소설 속의 화자든, 작가든 그 역시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가치관이나 신념 때문은 아니겠지만, 작가가 소설 내내 줄기차게 정당하고 마땅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삶을 끝내는 문제에 대해서 매끈하고 쉽게 결론 내릴 수 없었다고 짐작해본다. 우리 인간에겐, 배워서인지 직관인지 본능인지 알 수 없지만, 생명이나 삶에 대해서는 주인 행세할 수 없는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이 있다고.


존엄사에 대하여, 안락사/조력자살에 관하여 과연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을지는 묘연하고, 그 과정이 얼마나 길고 지난할지는 확실하다. 그러니까 나의 사유는 이쯤에서 마치고, 차근차근 업데이트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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