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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Feb 24. 2024

<살인자ㅇ난감> : 보통의 당신은 당황하고 당한다

논란의 여지를 잠재우는 영리한 설정과 현실

할 일 많고 볼 거 널린 세상에 <살인자ㅇ난감>을 선택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손석구/최우식/이희준, '살인자'가 들어간 난해한 제목, 재밌다는 친구의 한 마디. 이것들에 조금씩 빚졌고, 결국 끝까지 본 다음 뭐라고 말을 보탠 글들에 눈이 갔다. 일상의 몇 시간쯤 내어줘볼까. 제목이 감춘 수수께끼, 살인 혹은 살인자에 관한 화두를 지루하지 않게 풀 수 있다면.


초반에 압도된다. '보길 잘했네.' 흥미로운 인물이 쉽게 제거돼서 의아해하다 세계관을 알아챌 때쯤 웹툰이 원작이라는 게 생각난다. '복잡하고 불가해한 문제가 어떻게 풀릴 것인가'에서, '이런 세계관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기대의 방향을 바꾸었다. 후반으로 넘어갈 때 '그만 자고 담에 볼까' 머뭇거렸고, 다 보고 누우며 생각했다. '시간이 아깝진 않았어.' 확실히 보는 동안 즐거웠고, 나름대로 완결성이 있었다. 잠들기 직전 희미하게 덧붙인다. 그래도 '휘발되는 재미'에 가까웠다고.  


다음날 내게 남은 건, 피곤한 눈과 무거운 머리,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맛본 자의 조금 늙어버린 기분이 다가 아니었다. 미심쩍고 애매한 것을 건너뛴 듯한, 슬쩍 덮어버린 듯한 느낌은 뭘까... <살인자ㅇ난감>을 며칠 더 붙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에게 타인을 심판하고 처단할 권능이 주어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죽어 마땅한 자는 죽여도 되는가?' 혹은 '개인의 사적 복수가 정당한가?'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 그 문제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실제로 그런 권능을 가진 영웅이 있을 리 없고, 현실적인 의미에서 그런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흑화'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런 권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제멋대로 힘을 휘두른다면, 그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사람들은 보통 알지 않을까. '모두'가 '바로' 알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송촌의 의문(이탕은 확신을 가지고 살인하는가?)이나 이탕의 고뇌(나는 정말 선택받았나? 내 감대로 살인해도 정말 괜찮은가?), 그리고 장난감의 (합법적인 선을 넘지 말라는) 신념, 나아가 노빈의 (선택받은 자를 도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변태적 수고는 만화적 세계관을 뚫고 내게 다가와 어떤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만화적 세계관 안에서라도 해결되었으면 하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악함. 악함을 선택하는 자들을 어떻게 하지? 
보통 사람들은 그것/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할 수 있지? 
무엇을 할 수 있지?



이탕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편의점 알바로 일하면서 때때로 진상 손님을 상대해야 한다. 

길에서 양아치들에게 시비가 걸려 죽을 만큼 폭행을 당한다.

그 양아치들은 여중생을 윤간하고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뻔뻔하게 행동해서 피해자가 자살에 이르게 만들었다.

양아치들의 부모는 사과는커녕 적반하장 격으로 나왔다.

이탕이 도망친 곳에서 만난 또 다른 도망자 여자는, 전 남친이 유포한 섹스영상과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고 확대재생산 되게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일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경찰, 검사가 자신이 가진 권한으로 더 나쁜 짓을 하고 사적 이득을 챙긴다.

돈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법을 유린하며 타인을 착취하고, 그의 자식, 손자들까지 아무에게나 막말을 하고 법을 어긴다.



우리는 남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배웠다. 이유 없이, 아니 이유가 있어도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된다고 배웠다.

모든 사람이, 나만큼 다른 사람도, 내 아이만큼 다른 집 자식도 소중한 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 것을,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을 믿는다. 그 믿음이 흔들리는 현실을 본다 해도 믿고 싶다.



<살인자ㅇ난감> 속의 세계는 현실에서처럼 나쁜 짓을 하는 나쁜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하는 보통(혹은 착한: 이타적이라기보다 당한 만큼 되갚아주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람들이 나온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야기는 '죽어 마땅한 사람을 감으로 알아채고 반사적으로 죽이며, 그 행위에 대한 증거가 알아서 사라져 처벌받지 않는 능력을 부여받은 인물'을 창조한다. 이것은 새롭고 흥미롭지만, 당면한 문제, 실제로 우리를 괴롭히는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다. 불의를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탕, 아니면 적어도 송촌과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단 말인가?


물론 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지 못했다고 <살인자ㅇ난감>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게 이 드라마나 그 어떤 이야기의 마땅한 사명일 리도 없다. 다만 나는, 나쁜 사람들의 나쁜 짓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이 드라마를 허구의 이야기로만 소비하고 말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야기의 역할은 거기까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배운 대로, 생각하고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속으로든 겉으로든) 욕을 하고, 되도록 피한다. 그리고 그들이 아마도 벌을 받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피해당사자가 되어보면, 마비된다. 머리도 몸도. 당황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동한다고? 이런 말을 한다고? 그런데 그다음. 피해자(나)로서 놀라고 아프고 괴로운 것은 상식과 같은데, 그다음은 상식과 신념과 다르다. 엄마나 선생님이 나타나주지도 않고, 경찰이나 법이 합리적으로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 말이나 행동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커녕 당장 멈출 수도 없다. 그냥 가해자의 마음이 바뀌거나 어떤 운에 따라 그만두게 될 때까지 당한다.


당한 일 자체도 그렇지만, 그 이후의 상황이 배운 것, 상식, 신념을 배반하는 현실에 더 놀라고 더 아프고 더 괴롭다. 기가 막히지만 세상이, 현실이 그렇다는 분위기다. 분노하기도 하지만 반복되면 좌절한다. 간혹 우리가 배운 이야기대로 진행되는 현실에 사람들이 감동받고 박수를 보낼 때마다,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건지 실감한다.


말과 상식이 통하고, 그래서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들은 기분이 좋다. 편하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다. 실제로 쉽게 좋은 결과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많은 사람들끼리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분열하고... 그래서 피곤해지고 한 발 물러서는 사람들도 생긴다.


하지만 보통의 상식을 보란듯이 어기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토대를 공유하지 않은, 그것을 비웃으며 가뿐하게 짓밟는 그들에게 반격하기란 쉽지 않다. 이 안에서 통하던 논리/윤리는 서로에게 향하는 무기가 될 뿐, 스스로를 지키는 무기가 되지 못한다. 형편없이 무력하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너는 그렇게 흠이 없어? 어디 보자..." 그러면서 우리의 무기를 손에 든 그들에게, 그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 같은, '옥에 티' 같은 흠결로 철저히 박살난다.


어떻게 이런 현실에서 제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힘든 삶을 살다 죽고, 가족과 후손들이 명예롭기는커녕 조롱을 당한다. 힘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산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고 몸을 낮춘 사람은 짓밟히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입을 틀어막는 사람들은 스스로 입을 틀어막는 사람들 앞에 군림한다. 


보통 사람의 논리/윤리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도 이길 수도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시하고 살 수도 없다. 일상에, 공부하는 곳과 일하는 곳에, 그냥 지나다니는 길에서 그들은 맥락 없이 튀어나온다. 당황하다 정신을 차리고 온 힘을 다해 맞선다 해도, 그 반격이 성공하긴 쉽지 않다. 그런 쪽으로 단련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운 좋게 반격에 성공한다 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그쪽 입장도 고려해야지' 같은 선비의 논리/윤리가 우리 상식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기까지 피곤하고 어려운, 더 괴롭기까지 한, 기나긴 증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살인자ㅇ난감>은 '죽어 마땅한 자'만 골라 죽이고, '모든 증거가 알아서 사라지는 능력'을 가져와야 했던 게 아닐까? 논란의 여지를 잠재우는 영리한 설정이었다.



나는 <더 글로리>나 <살인자ㅇ난감> 같은, 나쁜 짓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본다면 어떨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낄까? 뜨끔할까? 문동은 같은 사람에게 복수를 당하고, 이탕 같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울까? 아니, 자신이 그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연진이나 재준이 쪽이라고 알아차리기는 할까? 당하는 사람들이 안쓰러운 마음이 들까, 아닐까? 문동은을, 이탕과 송촌을 응원할까?


나는 이야기에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게 유치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졌다기보다 현실을 납작하게 구현한다. 나는 확실히 세상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두 부류만 있는지, 모든 사람을 그 둘 중 하나로 나눌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모두에게 똑같이 착하거나 나쁠 수 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헤맬 때, 그래서 기꺼이 판단을 유보하기로 할 때, 나는 내가 현명한 건지 도망치고 싶은 건지 헷갈린다. <살인자ㅇ난감>을 보고 이런저런 의문을 쏟아내면서도 결국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믿는 대로 살겠다고, 그 상식과 신념이 배반당한다 해도 오히려 그것을 지키는 데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내가 양심적인 건지 어리석은 건지, 아니면 완전히 헛다리 짚고 있는 건지 언짢을 정도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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