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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Mar 24. 2024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 이 책은 남기겠다

이야기란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0.

책장을 보며 생각한다. 또다시 결별의 때가 왔군. 막내가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그림책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낼 책과 남길 책을 눈으로 가르며 살핀다.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앞. 아마 끝까지 남는 그림책들 중 하나가 아닐까? 내가 가진 열두 권을 모두 꺼내 처음부터 다시 읽어본다.



1.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림책을 많이도 읽었다. 그 세계는 한마디로 놀라웠다. 그냥 쉽고 단순하고 유치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거나 교훈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읽어주다 말고, "이야..." 감탄하고 묵념에 잠길 때가 많았다.


존 버닝햄의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야, 우리 기차에서 내려>는 아이들에게 읽어주다 보면, 어느 순간 다같이 반복되는 구절을 외치고 있을 정도로 몰입된다. 그런데 책을 덮으면 깨닫는다. 이건 철학책이잖아? 나는 아이들을 대할 때는 검피 아저씨처럼 해야 하는 거라고 깨달았는데, 아직도 멀었다.

<슈퍼 히어로의 똥 닦는 법>(안영은), <치카치카 군단과 충치 왕국>(이소을)은 아이들에게 알려줄 것들을 진짜 재미있게 잘 풀어냈다. 아이들이 재미있어서 자꾸 읽어달라고 한다. 사실 반복해서 읽어주기에 입 아픈 책이긴 한데(주 내용 말고 그림 곳곳에 글들이 매우 많다), 내 필요에 의해서 꺼내기도 했다.

백희나의 책을 읽다 보면 창의성과 완결성에 무릎을 치다 못해 꿇고 싶어진다. <장수탕 선녀님>은 정말 천 번도 넘게 읽은 것 같고, <구름빵>, <알사탕>, <이상한 손님> 등등 모두 진짜 이상한데 완전히 빠져든다. 이 책들을 읽을 땐, 나도 아이들이 되는 것 같다. 완전 처음 접하는 이야기에 딴생각이 안 난다.

최숙희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아기를 키우다 보면 한 번은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아이들 수준에 찰떡이다. 우리집에도 <너는 기적이야>, <나도 나도>, <괜찮아>, <누구 그림자일까?>, <커다란 알 하나> 등이 있다. 최고는 <엄마가 화났다>이다. 웬만한 엄마라면 메쏘드 연기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 눈물이 난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많이 읽어달라고 해서 연기에 지치긴 했다.

요즘엔 이지은의 책들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이파라파냐무냐무>, <팥빙수의 전설>, <친구의 전설>, <태양 왕 수바> 등. 딱 장난꾸러기 같은 이야기들이다. 싱거운데 웃기고 어딘가 짠하다.


이 책들과 여기 쓰지 않은 많은 책들, 내가 아직 모르는 많은 책들을 제치고 미야니시 타츠야의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를 끝까지 남기기로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2.

이 시리즈 중 첫 번째 책 <고 녀석 맛있겠다>는 애니메이션 영화(<고 녀석 맛나겠다>)로도 나왔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팔린 유명한 책이다. 내가 먼저 접한 것이 책이었나, 영화였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둘 다 재미있었다. 책이 시리즈라는 걸 알고, 한 달에 한 권씩 사들였다. 그렇게 열두 권. (글을 쓰려고 찾아보니 지금은 세 권이 더 나와 15권 세트. 도서관에 그중 두 권이 있어 빌려 읽어봤는데... 왜인지 조금 아쉬웠다.)


이 책은 아주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책에 비해 글밥도 많고 길이도 길다. 그래서 처음 읽어줄 무렵에는 좀 힘들다고 느꼈다. 의성어, 의태어도 많고, 특히 주인공인 티라노사우르스에 빙의하느라 목에 힘주어 소리를 쳐서 그런지, 진짜 목이 아파서 두 번 연달아 읽어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절로 구연동화를 하게 만드는 글이다. 장담한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다가, 공룡이 하나둘 등장하면 나도 모르게 어조와 톤을 바꿔 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대본처럼 역할극을 하게 될 것이다.



3.

그렇게 되는 이유는, 단지 말이 재미있게 쓰여서가 아니다(번역도 좋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다.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게 되어 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따라가다 한 번쯤은 놀라거나 웃거나 울거나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된다. 심지어 (동화책인데!) 해피엔딩이 아닌 이야기도 있다.


모든 이야기에 티라노사우루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야기마다 미묘하게 다른 인물인데, 못났거나 못됐거나 안됐다(이 셋의 조합도 있다). 그래서 친구도 없고 미움받으며 외롭게 지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의 타고난 힘만 믿고 살다가, 누군가를 만난다. 어리거나 약한 공룡(들). 티라노사우루스는 본성에 맞게 잡아먹으려 하는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러지 못한다. 그리고 그 공룡(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약한 공룡은 티라노사우루스를 전적으로 믿고, 무작정 좋아하며, 먼저 친절과 배려를 베푼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티라노사우루스의 좋은 면을 봐주고, 보이지도 않는 선의를 알아보고 끌어낸다.


그래서 티라노사우루스는 변한다. 고마움을 느끼고 고맙다고 말하고, 우정을 경험하고 친구를 소중하게 대하며, 친절과 배려를 베풀 줄 알게 되고,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에게 공감하고 그를 위해 희생한다. 정말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정말 독특하고 귀여운, 눈에 확 들어오는 그림에, 등장하자마자 '나' 같아서 감정이입하게 되는 캐릭터에, 재미나고 웃기게 쓰인 말들을 즐기며 빠져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움직여 있다.


드라마란 이런 게 아닌가? 이야기란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4.

하지만 이 책이 시리즈가 아니라, 그냥 한 권짜리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감탄했던 수많은 그림책들처럼, 그냥 한 번 진하게 가슴을 치고 차차 희미해졌을 것 같다. 짧은 이야기는, 시도 마찬가지고, 쉽고도 강력하게 나의 내면으로 훌쩍 들어오지만, 아주 굉장하게 나를 송두리째 흔든 게 아니라면(간혹 그런 그림책, 시가 있다), 내 안에 담겨 있지 못하고 곧 흘러나간다.


그런데 이 책들은, 1권 읽고 '재밌다!', 2권 읽고 '오. 괜찮은데?', 3권 읽고 '와... 이거 뭐지?' 이런 식으로 점점 감탄이 쌓이고 감흥이 진해진다. 티라노의 상대 공룡은 책마다 다르고, 겪는 사건도 달라서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언제나 티라노사우루스이고(이야기마다 다른 존재지만), '빨간 열매'라는 상징적인 소재가 모든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서, 하나로 묶인다.


익숙하면서 새롭고 풍성하게. 꾸준히 다양하게.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쓸 것인가, 힌트를 얻는다. 나로서는, 내가 좋은 글을 써야 하니까.


어쨌거나, 적어도 열두 권까지는 내 기준에 모두 주옥같다. 이번에도 다시 쭈욱 읽으며 몇 번이나 울었다.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는 책도 있다. 특히 9권 <모두 다 사랑해>는,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어쩌다 키우게 된, 다섯 마리 안킬로사우루스 이야기인데, 이들의 이름을 '해', '사', '모', '랑', '두'라고 지어준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점점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는데, '해'가 자신이 아빠의 최애라고 자꾸만 자랑한다. 증거를 대면서(아빠가 빨간 열매를 내게 가장 먼저 주시잖아, 잘 때 나만 할짝할짝해 주시고...). 어느 날 나머지 아이들은 샘이 나서 '해'가 바위산 아래로 떨어지게 만들고, 구하지 않고 돌아온다. 없어진 '해'를 찾는 티라노사우루스 앞에서, 아이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있었던 일을 전한다. 그러자 티라노사우루스는 말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해는 막 따서 신맛이 나는 열매를 좋아해서 가장 먼저 준 거란다.
두는 커다란 열매,
모는 말랑말랑한 열매,
랑은 작아서 먹기 편한 열매,
사는 약간 단단해서 아삭아삭 씹히는 열매를 좋아하잖니.
그리고 해는 빨간 열매를 늘 입가에 묻히면서 먹거든.
그래서 내가 핥아 준 거야. 그런 건데...



티라노사우루스는 '해'를 구하러 바위산으로 달려가고,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온다. 하지만 '해'를 구하려다 티라노는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져 바위 무더기 속에 파묻힌다. 나머지 아이들이 겨우 '해'를 구하지만, 아빠는 죽을 것만 같다.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말한다.



해가 말한 대로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해야.
그리고, 두, 너도 첫 번째로 사랑한단다.
사도 최고로 사랑하고,
모도 일등으로 사랑해.
랑도 으뜸으로 사랑한단다.
너희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단다.
그러니까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비교할 수 없단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 모두의 아빠니까.



나의 세 아이들을 앉혀놓고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울었고, 아이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아이들은 안킬로사우루스들의 이름이 결국 '모, 두, 사, 랑, 해'인 것을 알고 또 좋아했다. 이 책을 읽어준 이후로 '엄마는 누구를 제일 사랑하냐'는 질문을 받고 난처한 적이 없었다.



5.

아이들을 품에 안거나 곁에 끼고, 혹은 나란히 눕거나 엎드려서 책을 읽어준 시간은 '육아' 중 다른 일들과 달리,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으로 남았다. 같은 것을 보고 함께 웃고 놀라고 감탄하고 울었으니까. 아주 가-끔 지치고 질리기도 했지만, 거의 언제나 따스하고 즐겁고 풍요로웠다.

언제든 아이들과 읽었던 책을 펼칠 때마다 아이들과의 추억이 떠오를 거라 생각하니, 책이란 존재가 새삼 고맙고, 그 시간이 다시 뿌듯하다.


이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은 거의 없다.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를 리뷰하는 것으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준 10년의 시간을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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