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도 헤도헨 Jun 29. 2024

올해의 프로,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일상의 깔때기가 되었다.

"차 안에서 기침하시는 분들!! 제발 손으로 가리고 하세요!! 지금 창문 다 닫힌 상태에서 에어컨을 틀었는데, 기침하시면 그 침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쌩판 모르는 사람들 코, 입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서울 가는 광역버스 안에서 운전기사가 화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을 때, 방금 기침한 사람이 내가 아닌데도 반사적으로 화들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눈살이 찌푸려지며 왜 저렇게 위압적으로 말하는 건지 짜증이 났다. 갑작스럽고 기나긴 야단이 끝날 때쯤엔, 살짝 떨리는 그의 음성이 공격의 의미이기보다 공적 분노인가 싶어서 '고마운 건가?' 아리송했다.


하지만 이내, 고속도로에 들어서기 직전 신호에 걸리자 혼잣말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분을 표출하던 모습, 그전에 하차하려던 30대 남자가 벨을 누르는 대신 그냥 문 앞에 서자 '벨을 누르라'고 타박하던 모습, 또 그전에 막 승차한 20대 여자에게 '다음엔 핸드폰 보고 서 있지 말라'며 '차가 그냥 갈 수도 있다'고 잔소리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로 나무라던 모습이 연이어 떠올랐다. 운전기사는 성미가 급하고 권위적이며 타인에게 공격적인 사람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만약 내가 기침한 사람이라면 지금 얼마나 민망할까, 어쩌다 딱 한 번 '콜록, 콜록' 했을 뿐인데 얼마나 억울할까, 반박할 말을 찾으며 속으로 백 번은 싸우고 있지 않을까, 혹시 속에 분이 쌓이지 않았을까, 그럼 그건 그의 삶과 이 세상에 어떤 나비효과를 만들까,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는 장면처럼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흘러갔다.


딱히 질서가 있거나 평화롭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별일 없던 버스 안을 긴장과 부자유의 에너지로 채운 운전기사는 목적을 이룬 걸까, 그는 운전기사로서의 역할을 잘한 걸까, 그것은 정말 이곳 승객에게 도움이 되는 쪽일까, 나아가 이 사회를 좀 더 나아지게 할까, 아니면 각박하게 할까, 답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한,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시소처럼 바로 반대로 기우는 질문들도 계속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래도 같은 승객으로서 기침한 사람 쪽으로 팔이 굽다가, 다른 생각이 났다. 이를테면 버스 안에서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할 때 소리를 크게 트는 사람들을 종종 봤는데, 차 안에 있는 시간을 내내 불유쾌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해 그저 참았다. 나서서 말할까, 지적과 요구와 부탁 어디에 방점을 둘까, 어떤 어조와 표정으로 말해야 불필요한 감정의 왕래 없이 원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을 곱씹으며 시뮬레이션 하다 보면, 차라리 참는 일이 쉬울 지경이었다. 그럴 때 기사가 버스 안에 있는 모두를 대표하여 마땅히 나서줬으면 하고 바라지 않았던가? 그래서 역시, 그는 그의 일을 한 건가 싶다가,


만약 어린아이가 칭얼댔을 때(엄마로서 이런 미안하고 민망한 상황은 쉽게 가정할 수 있다)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또 그의 ‘공격적인 강직함’이 맥락을 살피지 않는 폭력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이 운전기사가 노인이나 어린이에겐 관대한 사람일 수도? 그렇다면 더욱, 오늘의 운전기사는 '좋은' 리더라고 할 수 있나...


아니, 그러니까 좀 부드럽게 말하지. 부드러울 것까진 없어도 그렇게 고압적일 건 없었잖아, 역시 태도가 문제... 하다가,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후 사검더컴)의 슈퍼맨(김재섭)이 떠올랐다. 그래, 슈퍼맨도 그랬지. 그도 자기의 '옳은'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동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또 어느 순간엔, 어떤 참가자의 이익과 맞물릴 때에는 그의 그런 점이 장점이자 강점으로, 때로 매력으로 받아들여졌다. 나 역시, 그가 '나와 맞지 않고 딱 피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다가, 어떤 순간엔 '어? 꽤 합리적이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떤 국면에선 '그렇지! 저렇게 해야지!' 응원하고, 또 어떤 때엔 '이런 면이 있었네' 하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렇게 한쪽 방향으로(그러니까 긍정적인 쪽으로) 나아가기만 한 건 아니고, 중간중간엔 '역시 저럴 줄 알았어', '아무래도 비호군', 그랬다.


슈퍼맨뿐 아니라 참가자 열두 명 모두에게 이런 식으로 마음이 뒤엉켰었다. 나로선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 이렇게 오늘도 사검더컴으로 생각이 흘러버렸다. 사검더컴을 본 이후로 거의 모든 상황에 그곳의 인물과 사건, 장면이 겹친다. 일상의 깔때기가 되었달까.


하지만 그 프로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매끈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 아무리 유보적이고 유연한 결론이라 하더라도, 그 앞에서 의심스럽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돌다리를 두드리듯 생각을 곱씹는다.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혹은 내가 다른 입장이었으면 나는 어떻게 느꼈을까?


수렴되지 않고 확산되기만 하는 이야기는, 나로서는, 허무하기도 하고 지친다. 재미도 갈수록 반감된다. 그런데 꽤 굳건하게 정리된 줄 알았던 나의 사고방식과 신념체계, 가치관과 세계관을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토록이나 전방위로 건드리고 흔들고 헤집은 이 프로그램은, 끝나고 나서도 좀처럼 아무려지지 않고 흩어진다. 때때로 데자뷔처럼 나타나 나를 멈칫하게 만들고, 꾸었던 꿈처럼 사부작 다가와 맥락과 상황을 다시 살피게 만든다. 나와 징하게 얽혔던 사람들인 것처럼 출연자들을 속속 소환해 납득 불가의 이상하고 못된 사람으로 까발렸다가, 시공간이 휘어져 맞닿아버린 듯 순식간에 다른 입장에 서서 '아아, 그랬구나' 하고 놀란다.


한편으로 삶이란, 나나 세상에 대해 잘 알아가고, 내 스타일을 찾아가고, 할 일과 안 할 일, 옳은 일과 그른 일,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을 구별하며, 그 와중에 차근차근 무엇이든 쌓아가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해놓았던 구별이 흐릿해지거나 모호해지고, 쌓아뒀던 것들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난다고 '허송세월'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인간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는, 이런 흐릿함과 모호함, 달라짐과 뒤섞임, 소통가능함이 필수불가결할 테고, 난 아무래도 함께 살고 싶은 쪽이니까.


어쨌거나 사검더컴은 방송사의 '쇼'다. 그런 만큼 그곳에 나온 사람들은 보통의 일반인이라고 할 수 없고, 사건과 상황도 현실의 모형일 뿐 실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영리하고 세밀하게 판을 짜고 탁월하고 깔끔하게 편집해낸 이 프로그램은,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정치에 대해, 권력에 대해, 소통해 대해, 관계에 대해, 매력에 대해, 신뢰에 대해, 불안에 대해 너무나 풍부한 텍스트가 되어준다.


살아갈수록, 경험치가 많아지면서 판단과 평가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다. 게다가 정확해진다고 느낀다. 확증편향이 심해진 것뿐일지도 모른다. 사검더컴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자신 있게 어느 쪽으로든 돌진하지 못하고 수시로 자꾸만 아른거리는 얼굴과 생각들을 붙들고 고개를 갸웃하고 어정쩡해진다. 이 불확실성은 확실히 나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하지만, 나는 왠지 언젠가 이 때문에 구원을 받을 것만 같다. 혹은 나로부터 다른 사람을 구원하거나.




+) 유튜브에서 1화부터 4화까지 풀버전으로 볼 수 있다. 나머지(총 11화+사전 인터뷰)는 웨이브에서.

https://youtu.be/8fMdmkBtrOo?si=UvjCAXyapzJu7M-S



+) 출연자들이 했던 사상검증 테스트 (*주의: 꽤 지친다. 질문도 많고, 반사적으로 답을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https://the-community-survey.web.app/ho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