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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싫은 사람

질문거리가 될 만한 것은 하나뿐이다.

by 모도 헤도헨

만나면 피곤한 사람, 기분 나쁜 사람, 싫은 사람, 헤어진 이후로 며칠을 앓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계속 만나야 할까?


어떤 사람은 싫은 사람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나이가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도 물건처럼 정리가 필요한 영역이라면서 만나서 좋지 않은 사람은 끊어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당장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고, 그래서 실제로 변한 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치울 수 있어.'라는 생각 자체가 주는 위안과 힘이 있었다.


그런 명제가 왜 신선했을까. 두 가지쯤 이유가 있겠다. 하나는 '어릴 때'는 그야말로 선택권이 없다. 나의 부모, 형제자매, 유치원이나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같은 반 친구,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한 동네에 사는 또래 등은 나의 정서와 신체, 그리고 영혼의 안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관계를 끊거나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옵션에 없었다. 피하거나 반격하거나 지지 않는 정도가 최선의 방책이고, 대체로는 당하면서 참아야 한다. 보통은 내가(성격, 정신, 세계관 등) 망가진다. 이를 갈며 힘을 키우고 어떤 교훈을 얻고 더 나은 어른이 된다면 아름답고 바람직한 결말이 되겠다.


또 하나는, 문제는 '그들'이 아니고 '나'라는 전제다. 배워야 하고, 바뀌어야 하고, 맞추어야 한다. 이건 내가 그들보다 특별히 이상해서가 아니라(가끔 그렇기도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겪는 '사회화'의 과정이라 받아들였다.


아무튼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들을 만나고, 결혼하면 배우자의 가족들과 만나면서 이 관계의 어려움과 피곤함은 계속 이어진다. 자식도 새로운 관계라는 점에서 마찬가지고, 자식을 통해 연결되는 사람들까지 생겨서, 관계의 우주는 원치 않게 개척되고 확장된다. 자식의 유치원이나 학교 선생님, 학원 선생님, 자식의 같은 반 친구,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한 동네에 사는 또래... (이렇게 인간사가 반복되며 이어진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끔찍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른'이 될수록 어느 정도 통제권이랄까, 선택권이랄까, 결정권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안 만날 수 있다. 적어도 덜 만날 수 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무시'를 할 수도 있다(참는 게 아니라).


그런데 놀랍게도 고민이 깊어졌다. 생각만 해도 마음의 짐을 덜었던 것은 분명한데, 선택권이란 게 인간에게 늘 그렇듯이, 실제로 사용하려고 보니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이게 맞을까? 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 더 좋은 게 맞나?


나는 만나면 싫은 사람을 정리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당장, 그리고 아마 이후로도 편할 것이다. 내게 해가 되는 스트레스를 막았으니까.


여기서 나는 두 가지 고민이 생기는데, 우선 (선택권이 생겼다는 점에서) 내가 사회적으로 좀 더 강해진 것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것은 내게 좋지만, 분명히 좋지만은 않다. 나는 언제나 실수를 하고 또 실제로 나쁘기도 한데, 내가 사회적으로 힘이 세진다는 것은(그러니까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내 마음대로 해도 제지나 반격,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적어지는 것은) 내가 악해질 수 있는(물론 이미 품고 있는 악이 있지만, 악이 실세계에 발현된다는 의미에서) 가능성을 점점 더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때 행복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언제나 나를 가장 괴롭고 슬프게 했던 순간은 바로 그러한 때였다.


다른 하나는, 비슷한 맥락인데, 나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하고 괴롭게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나를 갈고닦게 만든다는 점이다. 조금쯤은 부정하고 싶지만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여기서 질문거리가 될 만한 것은 하나뿐이다. 이제 와서, 이만큼 살았는데 여전히, 그렇게 갈고닦고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나를 상하게 하고, 때로 해하는 정도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것이 누구 잘못이든지 간에, 아니 아무의 잘못이 아닐 때도 얼마나 많은지. 혹은 적어도 입장 차이라거나.)


나는 이 질문 앞에서도 사실은, 별로 어려움 없이 답한다. 그렇다고.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 너무 건전하게 보여서 민망스럽지만, 왜 그렇게 생겨 먹었는지 몰라도 (자기 객관화를 할수록 어쩔 수 없이 직면한 가장 큰 결핍이었다는 추정) 어릴 때부터 나는 그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마치 당뇨환자가 단 음식들을 앞에 두고 욕망대로 했다가, 까딱 마음 가는 대로, 몸 편한 대로 했다가 어떤 후과를 감당해야 할지 본능과 경험으로 아는 것처럼, 나를 거스르거나 불쾌하게 만드는 것 없는 상태에서 내가 몸과 맘이 편한 대로 하는 것이 결코 내게 좋지 않다는 것을, 실은 독이 된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안다.


그래서,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경제적인 이유에서, 만나면 싫은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 왠지 모르게 피곤한 사람들, 만남 이후로 며칠을 머릿속에서 마음속에서 전쟁을 치르게 하는 사람들을, 부러 정리하지 않는 게 맞을 것 같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명절 연휴에 부닥치고 부대꼈던, 사랑하는, 사랑해야 마땅한 가족들을 두고 이런 생각들을 해서, 여러 모로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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