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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대안적인 것과 페리오

왜 어려운 길이 있는데, 쉬운 길로 가?

by 모도 헤도헨

무언가에 진심이면 경직되게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럴 일이 아닌데? 하는 한 줄기 빛이 스칠 때가 있다. 그때 웃을 수 있으면 아직 심각하진 않다.


며칠 전에 본 <션과 함께> 영상에서 션이 피디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 왜 어려운 거 있는데 쉬운 데로 가려고 그래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말에 말갛게 웃었다. 10여 년 전 어떤 장면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첫째가 만 3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품에는 100일이 지난 둘째가 있었다. 나는 어쩌자고 만 3세까지는 아이를 기관에 보내지 않겠다는 신념을 고수했고, 그러느라 둘째가 나온 이후로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육아와 가사 분담을 성실히 했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그즈음 우리는 첫째를 기관에 보내느냐 마느냐, 어디로 보내느냐에 관해 의논할 때마다 서로 답답해했다. 그때 남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사람들이 다 길을 만들어놨어. 그 길로 그냥 가면 돼. 왜 쉬운 길을 두고 고민하는 건데?"


그러니까 그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이라는 기관이 버젓이 있었고, 그곳이 '악'인 것도, 거기에 아이를 (내 기준에 좀 이르게) 보낸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남편도 조금은 편해지는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이런저런 상황상 만 3세가 아니라 돌이 되기 전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깔딱 넘어갈 것처럼 힘들면서도 그걸 선택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내 선택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더 어려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나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 어려운 것이 더 나은 것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러면 왜 넓은 길로 갈까? 우둔해서, 고민하기 싫어서, '좋은 것'보다 '쉬운 것'을 택하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만 3세가 된 첫째를 드디어 기관에 보내면서도 아무 데나 보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알아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공동육아나 발도르프 교육을 하는 곳. 여건이 도저히 안 돼서 기준을 낮춘다 해도, 자연친화적이고 전인적인 교육을 하는 곳이어야 했다. 수준 높은 교육을 한다거나 비싼 곳이라기보다 현재 세태를 쫓지 않는, 일반적이지 않은 곳.


아이가 더 자라고, 셋째가 태어난 후로도 나는 대안학교, 홈스쿨링을 끊임없이 알아봤다. 세미나에도 참여하고 상담도 받고 경험자들을 찾아 묻기도 했다. 거리, 규모, 학업이나 여러 활동에 들이는 공에서 차이가 있을 뿐 '일반적인' 기관들을 무시하듯 외면하고, 남다르게 더 좋은 것을 취하려 했다. 나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고 남들이 가지 않는 좁은 길이어도, 어려워도 그 길로 갈 의향뿐 아니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남편이 야속했다. 내가 좀 더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 좋은 걸 선택하겠다는데 알아주지는 못할 망정, 힘을 합치고 도와주기는커녕, 쉬운 길로 가라고 부추겨? 그 길로 왜 안 가냐고 다그쳐?


어쨌거나 첫째는 만 3세가 되던 달에, 차로 20분 거리의 넓은 잔디와 텃밭과 사육장과 뒷산이 있는 어린이집에 갔다. 이후로도 나는 해마다 겨울이 되면, 그간 틈틈이 알아보고 발품을 들인 정보를 손에 쥐고 기관을 바꿀까 말까 고민했고 실제로 바꾸기도 했다. 그 결과에 대해선 여러 마음이 들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알 수가 없고, 지나온 길에선 배운 것이 있으면 다행이겠다.


이런 노선이 확 꺾인 것은, 첫째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유치원을 옮기고 나서 한바탕 후회를 한 후였다(<육아의 순간들> 11화. 통탄의 유치원 졸업식). 더 좋은 것을 찾으려는 열망, 더 좋은 것이 있을 거라는 확신, 내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 내가 좋다고 택한 것이 아이에게도 역시 좋을 거라는 당위, 모든 것이 흔들렸고 흐릿했다. (우울증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첫째가 집 근처 공립 초등학교에, 둘째가 그 학교 병설유치원에 입학하던 날을 기억한다. 나는 그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벅찬 감동만큼이나 커다란 안도를 느꼈다. 그러니까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일반 초등학교에(그리고 둘째는 특별할 게 없을 일반적인 병설유치원에) 아이가 드디어 소속되고 나니, 안정감, 신뢰, 편안함이 사방에서, 아니 내 안에서 밀려오는 것이었다. 당황했다. 내가 바뀌었나? 원래 이런 건가? 뭐지?





회의주의자로서 회의주의자를 알아본다. 관습이나 체제를 꼭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라는 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흐름을 아랑곳 않고 거스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난 그런 사람들이 좋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과 연민, 연대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지 않은 대가를 치렀던 것 같고, 그만큼 나만 아는 즐거움도 누렸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듯 아니면 남들 하는 대로 해서 잘하는 것보다 남들 안 하는 걸 해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든, 나는 온갖 대안적인 것에 끌렸다. 남들이 다 간다/한다 싶으면 일단 뒤돌아설 정도로. 그런 나였기 때문에 <꽃들에게 희망을>을 감명 깊게 읽었던 건지, 아니면 그 책이 내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 것인지 나도 헷갈리는데, 모두가 하면 본능적으로 '망하는 길'이라 여겨진다.


내 삶도 그렇지만,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삶의 길을 놓을 때 역시 그런 선택을 했다. (천기저귀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모유수유를 길게 하고, 까다롭게 먹이고, 기관에 가기 전 오래 끼고 있고, 자연적이고 전인적인 교육을 하는 기관에 보내고. 내 가치관과 신념에 비추어 이런 것이 좋기 때문이었지만, '다수가 하지 않는다'는 기준이 과연 어느 정도 결정적이었는지 따져보려고 하면 가만히 뜨악해진다.


첫째를 일반적인 초등학교에 보내고 안도하고, 이후로 둘째, 셋째는 더욱 마음을 놓고 집에서 가까운 곳을 최우선 순위로 두며 기관에 보내며 만족했던 것은, 확실히 나 혹은 일반적인 기관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신선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취학 아동 셋을 키우며 우울증을 겪는 내가 물리적으로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하나였고 내가 팔팔했다면 다른 길을 한참 더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이제 와 생각하면, 아마도, 그 대안적인 길들이 더 이상 '특별히 남다른 길'이 아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도를 하니까, 또 거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어졌는지도.





나의 진로나 아이들의 기관만 그랬을까. 쌀, 우유, 과자를 살 때도, 밥솥이나 칼을 살 때도, 휴지나 샴푸를 살 때도, 뭔가 다른 게 없나 기웃거렸다. 비싸지 않고 기회비용도 그리 크지 않은 것일수록 나는 더욱더 맹렬하게 다른 것을 찾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느라 들인 시간과 에너지는 기회비용으로 치지 않았다. 재미있었으니까, 또 실용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지적으로 유익했으니까.)


치약 역시 한때는 오만 가지를 다 써볼 기세였다. 이제는 좀 귀찮아졌는지, 아니면 치약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선택을 위해 경제적인 판단을 내린 것인지, 경험한 것들 중 고르기로 하고 어느 날 아이들에게 물었다.


ㅡ얘들아, 치약 뭐 살까? 지금까지 중에 뭐가 좋았어?


1도 머뭇거리지 않고 둘째가 대답했다.


ㅡ페리오. 그게 짜기도 쉽고 거품도 잘 나고 적당히 매워.


내가 샀을 리 없는(너무 일반적이니까!),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 중 누군가 고른 명절 선물이었을 페리오. 국내외를 막론하고, 천차만별의 가격대를 무시하고, 불소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넣고 빼며 특별하다고 뽐내서 내가 샀던 그 모든 치약을 제치고... 페리오를 골랐구나. 어릴 적 티비에서나 대중목욕탕에서 맨날 보던 페리오를. 그간 이리저리 다소간의 변화를 주며 여전히 살아남아 건재한 페리오를.


다수가 가는 길엔 그 이유가 있겠구나. 그간 나는 무엇을 위해 바빴던가. 뭐, 그런 생각이 사방에서, 아니 내 안에서 밀려드는 동안, 한 줄기 파란색 페리오 치약을 들고 나는 헛헛해서 헛헛, 하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무지게 잘도 쓰고 있군.



+) 저는 페리오와 아무 관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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