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기적, 그리고 판타지
아이유와 박보검이 손 잡고 들판에 서 있는 사진을 보고 로맨스겠거니 했다. 촌스럽고 다 해진 옷을 입은 어린 애순이가 '나는 커서 대통령 다섯 번 할 거'라고 말하는 걸 물끄러미 보던 코 찔찔이 어린 관식이가 '나는... 영부인'이라고 말하는 쇼츠를 보고는 시대극이구나 했다.
이토록 수상한 시절에, 아무래도 현실의 퓨즈를 잠깐 꺼서 마음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회자되는 드라마라면, 이만큼 궁금해지는 드라마라면, <나의 아저씨>의 감독과 <동백꽃 필 무렵>의 작가가 함께 만든 작품이라면 의지해볼 수 있겠다고 짐작했다.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눈물 콧물 빼며 우느라 머리가 빠개지게 아픈 중에도, '아, 여성주의 이야기였네?' 하고 조금은 놀랐다. 너무 잘 버무려서, 빈틈없이 세밀하면서 유쾌해서. 이 땅에 사는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다 녹아 있었고, 복잡하고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일들을 잘도 풀어냈다. 나는 마음이 산산해지다가, '엄마들이 딸이랑 같이 봐야겠는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남자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떤 반응들이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중반,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는 이 이야기가 '엄마 혹은 부모의 삶'에 관한 것으로 보였다. 친정엄마가 된 나의 엄마와 어린 딸이었다가 다 커놓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딸인 나를 내내 떠올렸고, 아기였던 나의 딸들과 어느새 그때와는 다른 존재 같아진 딸들을, 어느 날에는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 내게 남같이 굴 딸들을 생각해냈다. 그때에 순순히 겸연쩍어할 나를 그려보다, 내가 없던 세상에 어린 아기였고 소녀였을 엄마가 눈에 선해지기도 했다. 겪지 않았어도 다 내 얘기 같은 이야기를, 겪었거나 말거나 다 알겠는 이야기를 보면서 뭐가 웃긴지도 모르고 웃고, 우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마무리할 즈음엔 '오랜만에 16부작이나 되는 드라마를 시시해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고 보네' 감탄했다. 재미며 감동, 대리만족에 주제의식, 연기며 만듦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군, 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한 며칠 바람을 잘 쐬었고, 몰아치듯 흔들리고 졸아드는 가슴을 잘 쉬게 했다고, 이제 커튼을 치고 현실을 마주하자고 되뇌면서.
그런데 현실세계에 자꾸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장면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엔 그림자 같았던, 소품 같았던,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땔감 같았던 양관식이, 그의 말과 행동과 선택이.
온갖 히어로물에서, 남자들이 다 해먹고, 여자는 나온다 해도 영웅을 각성시키는 장치이거나 액세서리일 뿐이어서, (영 몰랐다가 그게 보인 이후로) 우습고 치사했다. 그걸 제대로 뒤집은 이야기여서 한편으론 통쾌하고 흡족해하면서도, 언젠가 (혹은 지금도 누군가에겐) 이런 설정 역시 시대착오적으로 과한 것으로 보일까, 조금은 찝찝했다.
그런데 단순히 거울처럼 반사해서 반대로 바꾸어놓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작가나 감독의 의도를 제대로 읽은 건지, 아니 그런 것이 애초에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이 나이의, 지금의 나에게 그런 부분이 두드러져 보인 것뿐일지도.
어쨌거나 나는 드라마 막판 무렵부터 머릿속에 양관식만 돌아다녔다. 애순이도, 금명이도 멋지고 사랑스럽고 위대한데, 그들이 그렇게 힘을 내고 헤쳐나가고 특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양관식 때문이다. 누군가 한 존재를 그렇게 한없이 봐주고, 귀하게 여기고, 좋아죽고, 아껴주고, 지켜주고, 믿고, 추앙하고, 어디든 함께 가고, 헤아려주고, 손이 되고 발이 되어주면, 그 존재가 살아나고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여자와 남자의 문제가 아니다. 저마다 자기가 제일인, (물론 그게 사실이고 한편으로 마땅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부모도 아닌 사람이 타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도록 한결같이? 과연?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도 양관식은 판타지다. 그런데 그걸 바라는 마음은, 그런 존재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완전히 현실적이다. 나는 기어코 드라마를 나의 현실에 데려왔다. 마음 한구석에 아닌 척 웅크린 내 바람을 보며 아렸다. 나를 반짝반짝 빛나게, 활짝 피어나게 했던 사람과 시절을 떠올리고 문득 고마웠다. 조금은 양관식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잠깐씩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어봤다. 거칠고 삭막한 현실과 될 리 없는, 그럴 리 없는 기적 사이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판타지가 겹겹이 숨어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꿈을 심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