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복숭아, 그리고 고기를 대하는 저 세상 자세

무릎까지 꺾인다.

by 모도 헤도헨
ㅡ왜 굳이 밑에서 빼 먹는 거야?
ㅡ응... 아래 있는 애들이 못 생겨서... 아무도 안 먹고 걔들만 남으면 왕따 당하는 것 같을까 봐.


잘라놓은 사과 중에 골라먹는 줄 알고, 그러느라 모아놓은 사과들이 자꾸 헤집어져서, 둘째에게 한마디 하려던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이제 막 열세 살이 된 딸을 기 막힌 채 바라보노라니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썩은 복숭아 먹기 작전'. 이민정을 좋아하는 최다니엘은, 시라노 에이전시의 코치대로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여러 복숭아 가운데 썩은 복숭아를 골라 먹는다. 그리고 여주의 마음을 얻는다.


재미있지만 쉽고 뻔한 영화라고 생각하며 보다가, 이 부분에서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오, 진짜 전문가들인데? 나라도 그런 사람을 보면 눈이 가고 호감이 생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히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꺾인다. 사실 영화관 옆자리에 앉았던 남편이 그런 결의 사람이었기에 나는 잠깐 뭉클했다. 신혼시절의 일이다.





언젠가부터 밥을 먹다가 남편을 타박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은 딱히 가리는 음식도 없고, 맛이 덜하거나 없다고 깨작거리거나 투정하는 일도 없다.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고 안 먹는 까다로운 사람도 아니고, 조금밖에 없을 땐 적게 먹고 양이 많을 땐 다 먹어준다. 요약하면, 아무 때나, 내가 주는 대로, 주는 만큼, 잘 먹는다.


아주 맛있다고 상찬을 하는 일은 또 없어서 심심할 때도 있고 김이 샐 때도 있지만("어때? 맛있지?" "음, 괜찮네."), 그런 오버를 해주는 아이들이 셋이나 생겨서(막내는 왜 흑백요리사 안 나가냐며. ㅋㅋㅋ) 크게 연연하지도 않는다.


그럼 타박할 일이 뭔가?


쭈꾸미볶음에서 양배추를 골라먹어서, 이따 먹으려고 깨물어둔 것을 먹어서,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둔 것을 먹어서 등등. 그러니까, 남이 안 먹을 것 같은 것을 본인이 먹나 본데, 나로서는 쭈꾸미보다 양배추가 좋고,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거였구만... @.@


어쩔 땐 버럭 짜증이 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느냐, 어떤 상황인지 살피지 않은 배려가 가능하냐, 말이 많아진다. 그럼 남편이야 말로 @.@ 이런 얼굴로, '배려하려고 한 게 아니다, 그냥 별생각 없이 먹은 것이다' 억울해한다.


바로 어제 저녁에도 상추는 부족하고 고기는 넉넉했는데, 남편은 고기는 남겨두고 상추를 열심히 먹었다. (남편은 가리는 음식은 없지만 고기는 최고 좋아한다.) 나는 또 타박을 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지금까지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좀 의심하고 있었다. 괜히 그 영화를 봐서 이상하게 각인된 게 아닌가, 하고. 그러니까 꼭 연애 상황이 아니더라도 타인에게 호감을 주기 위해, 혹은 스스로 남을 배려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하고. 나는 그런 계산은 (심지어 상대나 상황에 대한 파악이 안 된 상태일 때는 엇나간 배려가 되니까) 어설프고 빤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입을 벌린 채 둘째를 보다가 깨달았다. '사과가 못생겨서 남이 안 먹을 테니 내가 먹는다'도 아니고 '남아 있을 사과가 혹시 왕따 당하는 것 같을까 봐'라니. 어떤 사람의 사고방식은, 그로 인한 행동방식은 내 체계를 뛰어넘는구나, 하고. 아예 다른 세계에서 사는구나, 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놔두고 굳이 남이 싫어할 것 같은 것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먹는 남편을, 나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 식대로 이해하고 판단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무릎까지 꺾인 것 같다.




+)

엄마의 복숭아


딸에게 복숭아를 잘라준다
흠 있는 것, 무른 것은 골라 내 몫으로 따로 두고
껍질과 씨에 붙은 살은 발라 내 입에 넣고
알맹이만 먹기 좋게 조그맣게 조각조각

아끼고 아껴도
새어 나오는 복숭아 국물처럼
우리 엄마 생각이 줄줄

딸에게 복숭아를 잘라주셨다
아기살 같은 복숭아, 행여 물러질까 살며시 잡고 살살 씻어
고운 살 따라붙지 않은 껍질만 스윽 깎아내서
하나 서운하지 않게 큼지막이 쑹덩쑹덩

서른이 넘도록 그런 복숭아를
귀한 줄도 모르고 먹은 딸이
제 딸에게 복숭아를 정성스레 잘라준다


나는 이런 시를 서러움에 잠겨 썼는데.

서른몇 살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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