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조부모의 마음이 든다
7세 셋째가 구름사다리 위를 기어 다닌다. 왈가닥 친구 C와 함께.
나는 벤치에 앉아 보다가, 혀를 끌끌 찬다.
사뭇 조심스런 스타일의 친구 S의 엄마가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며 묻는다.
"아우. 저거... 괜찮아요?"
나는 답한다.
"저러다 한 번 떨어져 봐야지 안 하겠구나, 해요."
그녀의 표정은... @.@;;
'하나는 평화롭고, 둘은 할 만하고, 셋부터 진짜 육아'라고,
먼저 셋을 기른 친구가 말했었다.
하나였을 땐 하나도 공감이 안 됐다가,
둘 키울 때 첫 번째 구절을 수긍했고,
셋 기르면서 나머지를 이해했다.
넷을 기르는 엄마에게 물었었다.
"없다가 하나도 다르고,
하나랑 둘도 다르고,
둘이랑 셋 역시 다르잖아요. (구체적인 설명 생략 가능)
넷은 또 어떻게 다른가요?"
그녀는 2초쯤 생각하더니, 답했다.
"넷은... 그냥 단체생활 같아요."
웃었다. 호기심의 질문이었지, 대비의 질문은 아니었으므로.
(그 경지를 경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아쉬움은 없다.)
나는 셋째를 키우면서 이전까지와는 완전 '다른' 엄마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아무튼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일단, 내 마음이 그냥 달랐다는 것이다. 어떤 노력이나 의지의 발로와 관계없이.
보통, '남의 애는 빨리 큰다'고 한다.
내 아이는 이제 한 달 지났고, 이제 50일 지났고, 이제 백일이고... 등등인데,
남의 애는 "오, 벌써 유치원 가는 거야?" 뭐 그런 식이다.
그런데 셋째는... 내 앤데도 빨리 크더란 말이다.
그렇다고 '남의 애'까지는 아니고...
한 다리 건너 정도?
뭔가 조부모의 마음이 든다.
그냥 이쁘달까?
어떤 기대나 책임감의 농도가 상당히 옅어진.
첫째만 있을 때 첫째를 향한 마음은 '신성함에 가까운 소중함'이었다.
둘째를 키울 땐 '짠한 미안함'이 어디에나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셋째는... '잡념 없는 이쁨'이다.
우쭈쭈, 해주고,
뭘 잘하기나 하겠어? (저평가가 아니라 평가에 대한 욕구조차 없음. 첫째 때는... 주위 아이들이랑 발달상황 비교하고, 잘하면 어깨 뽕 들어가고, 만약 천재면 어떻게 길러야 되나 사고실험하고...)
하고 싶은 거 있음 해, 그냥 해봐, (한다고, 큰일 안 나더라. 하다가 질리면 알아서 안 할 거고, 재밌고 좋으면 계속 하겠지, 지도 사람인데. 하면 안 되는 거여도 해보고 넘어가야겠지, 지도 사람인데.)
별 거 아닌 걸로 울면... 웃음이 나고, 그런다. (첫째가 그럴 땐 내 몸이 막 타들어가는 것 같고, 해결해줘야 할 것 같고, 같이 울고 싶고... 셋째가 울 때 하도 웃었더니 둘째조차 엄마는 왜 애가 우는데 웃냐고 항의를...)
그래서 사실은, 셋째가 아기일 때,
그러니까 제일 이쁘다고 표현해야 되나, 이쁠 수밖에 없을 때라고 해야 하나,
한 살, 두 살, 세 살까지...
아이를 보며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마음이어도 되나?'
뭐든 모 아니면 도인 나는,
내 아이를 향한 '절절한' 마음이 없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인생에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의 농도나 밀도 같은 것이 있다면,
나는 아마도, 연애시절의 초기,
그리고 첫 아이가 세 살 되기 전(첫째만 있을 때)이 최고치일 것이다.
온몸으로 느끼는 환희, 흥분, 행복감, 간절함, 설렘, 불안과 걱정 등등.
그런 감정에 말 그대로 '겨웠다'.
그런데 둘째, 셋째로 갈수록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려서,
어느 날은 좀... 싱겁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왠지 살짝 미안해지려고 했으나...
그 마음조차 이내, (그렇다, 아주 금방) 훌훌 털어냈다.
현생이 무지막지했으므로.
'이것이 너에게 주어진 너의 인생이다.
받아들이고 살거라.'
그런데 신기하게,
내가 그런 마음이어서,
이리도 가뿐해서,
아이가, 아이랑 함께 있는 것이 편했다.
첫째 때는, 첫째 아이의 먹놀잠에 맞춰 내 일정이 정해졌다면,
셋째는 그만의 일정표 따위 없다.
이미 언니들 중심으로 짜인 일정에,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비집고 지켜낸 내 일정에
당연한 깍두기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졸리면 자겠지, 주는 대로 먹어야지, 이게 다... 노는 거겠지?
그리고 놀라운 결과는...
이 아이가 제일 성격이 좋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성격'은 어디에서나 스스로 편하고, 잘 어울리고, 잘 지내고)
유레카... 라고 하기엔,
이제 써먹을 데가...
(물론 아쉬움은 없다)
첫째를 키울 때 내가 보인 어떤 '유난스러움'을 종종 떠올린다.
대부분 (양상은 다를지라도) 비슷하겠지, 싶은 게,
엄마들 중 첫째 엄마는 알아보게 된다.
나는 그게 '유난'이니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랬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때 내 마음이 그러했으니까.
이를테면,
첫째는 아이가 책을 정말 좋아해서 그랬기도 했지만,
날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책을 읽어주었다.
읽고 또 읽고 하다 외워버린 책도 많다.
둘째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첫째처럼 읽어주려 했었는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많이 읽어주려고 했다.
셋째는, 시간도 없고 우울증에 걸린 탓이 크지만,
7년 동안 책을 읽어준 횟수가 첫째 한 달 동안 읽어준 횟수랑 비슷한 것 같다.
첫째는 지금도 놀라운 독서량과 수준이다.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류의 책만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주로 만화책)
셋째는... 혼자서 알아서 찾아 읽고 있다.
첫째는 티비를 가능한 안 보여주려고 했다.
할머니집에 가서 어쩔 수 없이 티비를 보게 될 때는
옆에 딱 붙어 앉아 계속 말을 걸었다. ("저게 호랑이야. 움직이는 건 처음 봤지?")
그런데 셋째에게는 종종 말했다. "티비 볼래?" "티비 봐라..."
지금 티비에 제일 무심한 자는, 그렇다, 셋째다.
그러니까 나는,
한 인간이 다 예상하거나 계획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a를 위해서 가, b를 피하기 위해서 나, 이런 식으로 할 수 없는 것 같다는 깨달음에 대해서.
그때의 내 마음에 진실했고, 나름 최선이었다는 데에 스스로 기특하고, 스스로 위로를 건넨다.
말하자면 이런 것 같다.
첫째를 키우는 것은, 내가 덕질하는 감독 혹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때의 태도라면,
셋째는, 어쩌다 시간이 괜찮아서 보는, 볼 만한 일일연속극을 보는 태도?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는데,
1번과 3번은 비교불가의 수준인 줄 알았는데,
계속... 오래... 그런 대로 즐기며 보다 보니, 너무 좋아져버린 거다.
그에 반해 1번과 2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흐릿해져서... 전생 같아졌다.
또 이게, 이런 류의 이쁨이 마지막이라는 걸 문득문득 절감하는 순간,
비교불가의 차원으로... 소중하고 이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어느덧... 물고 빨고 눈에서 꿀 떨어지고 하게 되었다. (너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안아달라고? 큰언니는 네 나이 때 동생이 둘이었어!" 하면서도 안아주고 업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