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며 가장 많이 한 생각
첫째가 베란다에서 한참 꼬물대다 갑자기 남편에게 전화한다.
"아빠, 베란다에 있는 페트병, 거기 들어있는 거 뭐야?"
"그거? 어... 벌레 죽이는 약인가?"
(첫째는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습관이 있다)
둘째가 갑자기 나타나 말한다.
"아니야. 그거, 내 바다포도에 주는 소금물이야!"
남편이 말한다.
"근데 왜?"
"아... 내가 그거 몬스테라랑 고무나무에 줬거든..."
"아... 진짜? 아휴... 일단 알았어."
나는 몸살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럼에도 한숨과 함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물은 아빠가 주니까 주지 말라 그랬잖아!"
웬만해선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첫째가 내가 있는 안방으로 와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건 없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무 물이나 주는 거야? 네 호기심 때문에 그거 죽으면 어떡할래? 아빠가 몇 년 동안 공들여 키운 건데!"
말하면서 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하루 종일 아프고 기력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움직일 힘도 없던 내가 맞나? 나도 놀랄 지경이다.
"미안해..."
아이는 결국 자기 침대로 가서 운다.
내 머릿속엔 소금물 때문에 몬스테라와 고무나무가 죽는 사태가 그려진다.
그동안 애써 그것들을 키운 남편의 모습도 떠오른다.
한순간에 만회할 수 없는 상황이, 그것도 생명에 해가 가는 결과는 나로선 견디기 힘든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건 내 입장.
좁고 박한 내 입장.
돌아온 남편은, 보이지 않는 첫째가 침대 위에서 울고 있다는 걸 보고는 놀란다.
"에이. 괜찮아. 아빠가 벌레 죽이는 약인 줄 착각했어. 오늘 어차피 물 주는 날이니까 소금물 조금 줬어도 괜찮을 거야. 근데 담부터 진짜 아무 물이나 주면 안 돼. 알았지?"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인색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새삼 깨닫는다.
평소 잘 자라거나 말거나 그다지 관심도 없던 식물들 때문에(그것에 진심인 남편을 염려한 건 사실이지만)
딸의 실수를, 그것도 자신이 잘못한 걸 알고 부끄러워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넘어가지 못하고 비난하고 혼내는 게 너무나 중요한 사람인 나.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다가도.
정신을 부여잡고, 첫째에게 사과한다.
"엄마가 아까 너무 아파서, 판단을 제대로 못했어. 잘못했을 때 감싸주지 못해서 미안해."
첫째는,
"내가 잘못했는데, 뭘,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엄마." 하고 말하더니, 덧붙인다.
"근데 엄마, 하나도 안 아파 보였어."
ㅋㅋㅋㅋ
웃으며 운다.
오늘도 실패했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제일 많이 느낀 감정은,
'감사하다'이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일을 겪든, 결론은 늘 그랬다.
내 앞에 있는 존재를, 이 존재가 내 앞에 있음을,
감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오늘도 실패했다'이다.
날마다, 날다마 실패했다.
전문가든 누구든 타인의 기준에서도, 내 기준에서도.
잘하려고 했는데, 잘했어야 했는데, 잘하고 싶었는데,
분명히 잘못했다.
다음엔 그러지 말자고, 잘해보자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도,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또...
어떤 '성공'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게 무슨 상태라고 정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라고 믿고 싶다).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오늘 나 때문에, 나의 말과 행동, 표정과 어조, 한숨과 초조함, 불친절과 무례함 때문에,
놀라고 머뭇거리고 어쩔 줄 몰라하고 무서워하고 울어버린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남편에게 내 잘못을 토로하거나
자는 아이 보면서 미안해하며 울거나
일기 쓰거나 기도하면서 가슴을 치거나...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이어지다 보니
자괴감이라는 말조차 질려버릴 때쯤
나에 대한 '희망' 같은 게 없어졌던 것 같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잘 챙겨먹고 싶지도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악순환의 궤도를 탄다.
'엄마도 인간인 걸',
'다른 엄마도 다 그래',
'그래도 노력하고 있잖아'
어떤 사실도, 어떤 위로도
잠깐의 위안 이상은 되지 못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무력한 대상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스스로를 벌주고 있었기 때문에,
빠져나올 구멍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지 않은 씨앗에서 비쭉 올라온 새싹을 발견하듯
경이롭게 깨달았다.
그 무력한 대상이, 나를 용서했다는 걸.
계속 용서하고 있고, 기회를 또 주었다는 걸.
그것은 구원 같은 기쁨이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주는 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사랑도 용서도 혼자서 하는 건 답이 없다는 걸 배운 것 같다.
아이가, 무력해서든 엄마를 사랑해서든 뭘 몰라서든,
지금까지는 나를 용서하고 새 하루를 주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의 가슴에는 나로 인한 슬픔이나 설움 혹은 원망이 새겨질 것이다.
꽤 긴 시간 가장 미운 사람이 되리란 것도 짐작한다.
이것은 내게 전혀 괜찮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도 실패했다'는 생각으로 입술이 찌그러질 때,
감은 눈을 다시 뜨고 싶지 않아질 때,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 사랑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