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상자

산문시

by 몽중상심

어느 날 낚시를 하다 주운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푸른 하늘과 붉은 바다 그 사이 어딘가에

나의 보물을 묻어두었다

어둠 속의 횃불처럼, 오밤 중의 등불처럼

은은하고 밝게 빛나는 나의 소중한 보물

앞으로 몇 발자국 가야 그 보물이 나올까

너의 발자국으로 지난 발자국들을 지워라

너의 땀으로 바닷물을 깨끗하게 해라

그 속에 답이 있다'

두리뭉실한 내용에 마지막에 적혀 있는 섬 이름

무작정 나는 그 섬으로 발길을 돌린다


하늘에 갈매기들 누군가가 그리운 것인지 떠돌아다니고

어디서 한 대 맞은 코코넛은 멍들고 쪼개져 모래에 눈물

흘리고 있다

모래 위에는 빈 상자가 넘쳐나고

비어있는 캔과 쓰레기들이 이 섬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떻게 이런 곳에 보물이 있다는 걸까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는 이곳에

무슨 대단한 게 있단 말일까

보물을 찾기 위해 온 이곳이지만

여태껏 살아왔던 나 중에서 오늘의 나는 가장 멍청한 것 같다

씁쓸한 발걸음 돌리려니 들어온 길 보이지 않는다

넓디넓은 망망대해에 작은 점 하나

그 위에 나 우두커니 덩그러니

작디작은 점 위에 얹혀 있다

비어버린 캔엔 달큰한 향만 가득하고

쓰레기 더미에서는 당장 쓸모도 없는 비닐만 한가득

나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리며 모래를 발로 힘껏 짓이기고

땀 맺힌 채로 어푸어푸 바닷물을 두 팔 벌려 밀어낸다

거슬리는 쓰레기는 구석에 치워버리고

식욕 돋우는 캔은 모래 채워 단 내 감춘다

이제 좀 깔끔하다

보통 보물은 묻혀있는 경우가 많지

귀하고 귀할수록 숨겨놓으니까

유추해 보았을 때 아무 데나 묻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고..

커다란 바위 근처나 튼튼한 나무 근처에 묻어 놨겠지

눈에서 불이 나도록 꼼꼼히 찾다가

모래가 배불렀는지 불룩 배를 내민 곳을 찾았다

신나는 마음으로 두 손 가득 모래를 파낸다

둔탁한 상자가 짠하고 나타났다

멋있는 무늬에 꼭 왕의 보물상자 같은 모양새이다

터질 듯한 풍선처럼 부풀어버린 기대감을 껴안고 상자를 활짝!

그러나 그 상자 역시 텅 비어있었다

제길! 상자를 발로 힘껏 차버리고 나는 좌절에 빠졌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에 휘말린 것 같았다


투둑.. 툭.... 투두두두둑.....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물이 한 두 방울 떨어지더니

하늘이 거침없이 눈물 흘린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히 없는 곳에서

나는 급하게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비닐로 몸을 감싸고 조그마한 천장이 있는 집을 만든다

곧이어 널브러진 캔에는 빗물을 받고

비어있던 상자에는 모래 한가득 넣어 비닐 집을 고정한다

오들오들 몸을 떨며 누운 채로 무겁게 버티던 눈꺼풀을 잠시 놓아준다


번개가 소리치고 구름이 눈물 흘리던 영원할 것 같았던 밤이

무사히 지나갔다

다행히 지나가던 배가 내 흔적을 발견하고는

나를 구조하러 왔다

외딴섬에 왔다 된통 당하고 깡통만 차고 가는 게 억울하지만

그래도 내 선택이었기에 별수 없다

다시 내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칙칙했던 내 세상에 누가 생기를 불어넣은 걸까

흑백뿐인 내 세상에 누가 색을 채워 넣은 걸까

아니다. 누군가의 소행이 아니야

꿋꿋이 평생을 닫혀 있을 줄 알았던 내 두 눈이

마침내 떠오르는 해와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을까

버림받은 것들이 비로 인해 쓸모가 생겼다

어쩌면 보물보다 귀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외딴섬에 가기 전에는

냄새나는 쓰레기 더미와 쓸모없는 캔, 빈 보물상자뿐이었는데

아름다운 꽃들과 먹음직한 진수성찬, 모래 낱알처럼 차 있는 금화가 담긴 보물상자까지

내게도 봄이 오는 걸까

어쩌면, 빈 상자는 내게 가장 필요했던

봄날의 꽃이었을까

어쩌면, 그때 묻혀있던 보물상자도

텅 비어 있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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