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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축학도 Dec 16. 2024

[제1장] 수집: 빈티지 가구

제품에서 나오는 기(氣)

앉지 못하는 의자를 만들어보세요.

 내가 속해 있던 건축학과에서는 매년 초 신입생 환영회와 함께 소위 크로스이어(Crossyear)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는 신입생부터 졸업반까지 모두가 한 조로 구성되어 하루 동안 특정 미션을 수행하는 연례행사였다. 그리고 언젠가 크로스이어에서 받은 공통 미션이 있었는데, 바로 '앉지 못하는 의자'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미션을 받은 순간, 조별로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대부분은 의자에 단순히 기능적 결함을 주기보다는 특정 의미를 부여해 ‘앉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도 가끔 집에 있는 빈티지 의자를 볼 때면 그때의 미션이 떠오른다. 내 앞에 있는 이 의자를 예술품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기능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마치 내 것임에도 내 것이 아닌 듯한 묘한 감정이 들 때가 있다. 빈티지 가구를 거래하다 보면 판매자들이 간혹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다.


실사용보다 오브제(Objet)로 추천드려요


 ‘오브제’라는 단어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실질적인 사용보다는 작품으로서 감상할 것을 권장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연식이 워낙 오래되어 사용이 어려운 물건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태가 멀쩡해 직접 사용하려고 구매한 가구에까지 이런 말을 들으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제품(가구)은 관찰 대상만이 아니라, 내가 직접 사용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고 믿는다. 때문에 나는 빈티지 가구에서 나오는 기(氣)에 압도되지 않고 내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제품을 존중하며 실사용을 선호해 왔다. 정성껏 관리를 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말이다.



의자에서 나오는 기(氣)

 

 빈티지 가구를 모으다 처음으로 그 기(氣)에 눌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영국 가구 브랜드, 비초에(Vitsoe)의 1960년대 Lounge Chair Programme 620이었다. 서울 연남동 인근에서 어렵게 구한 이 의자는 내게 더 큰 애착을 주었다. 특히 공교롭게도 내가 구한 제품은 서울 논현동에 위치한 스페이스 비이(Space B-E)에서 열린 2014년 윤현상재 Mid-Century Modern Furniture 전시에서 선보인 바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원룸 한가운데에 이 의자가 자리하자, '이런 누추한 공간에 어울리는 의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가 지닌 상징성과 유니크함, 그리고 묵직한 존재감 때문인지 한동안 앉는 것조차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의자를 디자인한 디터 람스(Dieter Rams)의 철학을 다시 떠올리며 조금씩 이 의자에 편하게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620 라운지체어는 기본적으로 지속 가능한(Sustainable) 디자인을 추구한다. 미니멀하고 조립과 해체가 용이한 이 의자는 지금도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여기에는 디터 람스의 디자인 철학인 'Less but Better (적게, 그러나 더 좋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게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이 의자를 '디자인 물건(오브제)'가 아닌, 매일 편하게 쓸 수 있는 의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디터 람스는 단순히 한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의 이름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곧 디자인 철학이자 그 이상을 상징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디터 람스를 모은다."는 다소 어색한 표현을 하며 그의 작품과 관련된 물건들을 소소하게 수집해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그가 제시한 디자인 10 계명(아래)을 평소 제품을 통해 직접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좋은 디자인은,

  1. 혁신적이다.

  2.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3. 아름답다.

  4. 제품을 이해하기 쉽게 한다.

  5.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

  6. 정직하다.

  7. 오래간다.

  8.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9. 환경을 생각한다.

  10. 가능한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


Vitsoe 620 Chair Programme by Dieter Rams, 1960년대 제품. 가죽부터 프레임까지 모두 오리지널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제품인가 작품인가. 그 경계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빈티지 시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빈티지 가구를 볼 때 제품(상품)과 작품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보다, 두 개념이 동시에 공존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수많은 빈티지 가구들은 기본적으로 오랜 세월을 누군가와 함께한 것들이다. 그중에는 유명한 것들도 있고, 소소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품인지 작품인지는 결국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좀 더 넓게 보면 마치 양자(Quantum)와 같다. 0과 1이 공존하는, 즉 제품과 작품의 경계에 서 있다. 내가 그것을 규정하는 순간, 그것은 제품이 되기도 하고 작품이 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의 것들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지기도 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내게는 작품인 Thonet 빈티지 S34 체어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낡고 불편한 가죽 의자일 수 있다. 갈라진 가죽과 녹슨 크롬 소재의 의자일지라도 나에게 그것이 작품이라면, 그건 분명 작품이다. 빈티지 가구를 모은다는 것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 가구가 지나온 시간을 함께 소유하고, 그 이야기를 이어 써 내려가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빈티지 가구만이 지닌 새로운 가치를 몸소 느끼게 되고, 그것은 내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돌이켜보면 빈티지 가구들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확실히 잘 만들어진 제품은 유행과 무관하게 그 가치가 지속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본디 디자인의 원칙과 본질에 충실한 결과가 아닐까. 


Thonet S34 Chair by Mart Stam, 1980년대 제품으로 추정. 오랜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여전히 의자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독일 Gerlinol 빈티지 트롤리, 1970년대 제품으로 용도에 따라 한쪽 혹은 양쪽을 펼쳐둘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서빙 카트와 동시에 멋스러운 수납장이기도 하다.



빈티지 가구 나이테


 얼마나 오래된 나무인지 가늠하기 위해 나이테를 보듯, 가구는 그 소재와 상태(Condition)를 살펴보면 대략적인 연식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제품의 생산 시기에 따라 로고나 텍스트, 형태 등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다. 이런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가구도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육안으로 쉽게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컨디션이지 않을까 싶다. 그 시절 많이 쓰였던 대표적인 재료는 나무, 쇠, 가죽, 그리고 플라스틱이다. 특히 자연에서 온 재료들은 저마다의 질감이 다르기 때문에 가구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가죽은 오래 사용할수록 자연스럽게 에이징 되는 멋이 있다. 풀 그레인 레더(Full grain leather)처럼 등급이 높은 가죽은 관리가 어렵지만, 천연의 상태에 가까워 시간이 흐를수록 가구만의 색과 질감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가죽 소재를 사용한 빈티지 의자를 특히 좋아한다. 누군가 남긴 스크래치 흔적, 오랜 세월로 인한 색바램, 그리고 주인의 습관이 묻어 생긴 가죽 늘어짐은 그 가구의 연륜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나무 역시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소재다. 목재의 종류에 따라 무늬와 색감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개인적으로는 월넛(Walnut)과 티크(Teak) 우드를 선호하는데, 중후하면서도 묵직한 색감을 보고 있으면 자연 그대로의 디자인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목재를 곡선으로 가공하면 나무 결을 따라 흐르는 그 자연스러운 패턴이 너무나 멋스러워 나도 모르게 빠져드게 된다. 오래된 목재는 코팅이 벗겨져 자연스러운 갈라짐이 생기는데, 그렇게 드러난 본연의 질감조차 처음부터 계획이라도 한 듯 멋스럽다.

 쇠나 플라스틱 같은 소재도 마찬가지다. 금속은 녹과 스크래치조차 멋스럽게 자리하며, 플라스틱은 시대에 따라 다른 소재에서 보여줄 수 없는 그것만의 독특한 질감과 형태를 보여준다. 이처럼 빈티지 가구는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있으며, 이는 고스란히 그 천연 재료에서 조금씩 흘러나와 느낄 수 있는 재미다. 나는 이것을 빈티지 가구 나이테라고 말한다.


Castelli DSC 106 Chair by Giancarlo Piretti, 1970년대 제품. 시간이 흘러 생긴 녹과 스크래치마저 자연스럽다.


Fritz Hansen Series 7 Chair by Arne Jacobsen, 1991년 제품. 나무 결에 따라 자연스러운 갈라짐과 얼룩이 멋스럽다.


Thonet S34 Chair by Mart Stam, 1980년대 제품. 등판의 가죽 갈라짐과 에이징은 이 의자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파티나(Patina)다.



결국은 재활용


 제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새롭게 부여하는 일. 지나고 보니 빈티지 가구들은 모두 롱 라이프 사이클을 추구해 왔던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지속 가능한 제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클래식은 영원하다 했던가. 한때 지속 가능성이라는 키워드가 크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 가능한 제품, 브랜딩, 디자인, 마케팅이라는 개념이 빈번하게 노출되기도 했다.

 사실 새 제품도 누군가의 손에 들어와 사용되는 순간부터는 중고가 된다. 빈티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빈티지는 재활용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미래에도 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제품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 오래된 것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품고 있다. 새것 같지도 않은 낡은 60년대 의자가 특별한 빈티지 가구로 재탄생하는 순간, 70년대 목재 테이블이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으로 다시 조명되는 순간, 제품은 새로운 가치를 얻는다. 제품의 스토리를 알고 그것을 재활용하게 되는 순간, 가구는 다시 활력을 되찾는다.

 과거의 시대사조를 반영한 제품들은 그 특색이 뚜렷하지만, 유행을 넘어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것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치를 한데 모아 판매의 장을 연 기업이 있다. 바로 디앤디파트먼트(D&DEPARTMENT)다. 개인적으로 이곳의 대표 나카오카 겐메이(長岡 賢明)의 책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공감 가는 포인트가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기업은 롱 라이프(Long Life) 제품을 추구하며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다시 판매하는 구조를 통해 지속 가능성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빈티지 가구를 포함한 오래된 물건들은 단순한 중고품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제품이자 작품으로서 재조명받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재활용 시장은 무궁무진하다.


빈티지 가구는 특히 오래도록 사용되어 온 소품들과 잘 어울린다. 같은 시대를 함께 지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오래된 제품들을 찾고 모으게 되는 걸까. 어쩌면 오래된 것들에 대한 동경과 함께, 시간을 되돌려 그 시절의 물건(혹은 추억)들을 다시금 붙잡고 싶은 마음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 앞에서 자연스레 발길을 멈추는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에, 그 시간을 온전히 간직하고 유지해 온 물건들을 보면 마치 그것이 기특하기라도 한 듯 더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아닐까.

 결국, 어떤 물건이든 그 진정한 가치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나에게 빈티지 가구는 감상의 대상만이 아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동경과 존경이며, 디자이너의 정신과 철학을 몸소 느끼는 과정이다. 그렇게 내 곁에 있는 빈티지 가구는 어느덧 내 삶에 스며들어 소중한 존재로 남아 있다.



TIP!

 빈티지 가구를 전문으로 다루는 오프라인 샵이 있다. 중고 거래 사이트나 앱에서도 원하는 제품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새 제품보다 낮은 가격으로 더 멋스러운 가구를 구매하는 방법이 바로 중고 거래다. 다만, 유명한 제품은 가품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낮다면 의심해 보는 것이 좋다. 

 가구 관리를 위해 가죽 소재는 캐럿(Carat)을, 나무와 크롬 소재는 풀젠틴(Fulgentin)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빈티지 가구의 가장 큰 매력은 잘 관리만 하면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방치하면 손상이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으니 주의하자. 아래는 빈티지 가구를 알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될만한 몇 곳이다.


 1. 오드플랫 (https://oddflat.com/

 2. 원오디너리맨션 (https://www.instagram.com/oneordinarymansion/)

 3. 에이치코너 스튜디오 (https://www.instagram.com/h_corner_studio/)

 4. MK2 Showroom (https://www.instagram.com/mk2showroom/

 5. 4560 디자인하우스 (https://www.instagram.com/4560designhaus/)

 6. 콘란샵 (https://www.conranshop.kr/main/mainView.lecs)


 을지로 3가 역 1번 출구 골목에 있는 한 카페에 들어섰을 때, 낡고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조명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마치 개화기로 돌아간 듯한 기묘한 경험을 했다. 시간을 품은 가구들 사이에 앉아 홀로 드립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모여 하나의 공간을 한 폭의 작품처럼 만들어냈고, 언젠가 이곳에서 1950년대 라이브 재즈 공연이 펼쳐진다면 더욱 공간이 살아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년이 흘러 2020년 1월, 나의 첫 번째 '이비인후 프로젝트'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빈티지 가구들이 내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었고,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 순간이었다.


빈티지 가구가 모인 을지로 3가 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한 프로젝트.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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