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코 그리고 입을 통한 브랜드 경험
매해 명절 당일 저녁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었고, 한 병의 위스키 혹은 브랜디(brandy)가 테이블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술이라는 역할을 넘어 가족 모임의 분위기를 더 좋게 만드는 어떠한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는 위스키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독한 술일뿐이라는 인상만 있었다. 하지만 병의 모양, 빛나는 라벨, 그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글씨체만큼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라벨에는 위스키 증류소 이름과 숙성 연수, 그 외 다양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술은 과연 어떤 맛일까?'라는 호기심도 자연스레 생겨났다(물론 마시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때부터 위스키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마실 순 없어도 눈으로 보고 읽는 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대가 된 어느 날, 나는 한 지인 모임에서 우연히 위스키 한 잔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위스키를 마신다'는 행위 자체만 멋있게 느껴졌다. 그 관심은 겉모습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위스키를 하나씩 접할수록 마시는 것을 넘어 그 깊이와 매력을 알아가게 되었다. 위스키 병의 형태, 라벨의 디테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브랜드 스토리까지 나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어릴 적 느낄 수 있었던 시각적 즐거움은 동일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 이제는 코와 입으로 경험하는 향과 맛, 여운이 더해지며 위스키는 그 자체로 복합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매력에 이끌려 나는 어느새 하나의 제품(Product)으로 위스키를 한 병 두 병 수집하기 시작했다. 향수도 그 캐릭터를 묘사하는 시각적인 패키지와 함께 탑 노트, 미들 노트, 베이스 노트와 같은 향의 변화를 즐길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위스키는 마시는 향수로 곧 잘 비유되곤 한다. 마시는 즐거움은 물론, 잘 만들어진 제품으로서의 가치를 느끼며 수집한 위스키들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위스키 테이스팅은 (1)눈으로 먼저 색을 보고, (2)코로 향을 음미한다. 그리고 (3)입을 통해 맛과 여운을 느끼는 순서로 진행된다. 그래서 테이스팅 항목으로 Color(색), Nose(향), Palate(맛), Finish(목 넘긴 후 느낌)으로 구분하곤 한다. 이처럼 한 잔의 위스키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복합적인 감각을 사용해야 한다. 그 순간은 단순히 음주를 넘어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오게 된다.
어떤 제품을 짧게 경험하라고 하면 그 본질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보통 위스키를 고도수 술로만 인식하게 된 건, 샷(Shot) 잔에 위스키를 가득 따라 목으로 빠르게 넘기는 문화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그래서 위스키를 제품으로써 즐길 틈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위스키는 '마신다.' 보다 '맛을 본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여유 있게 감각을 열고 제품을 보다 보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제품(브랜드) 담당자는 짧은 시간 내 고객이 제품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수도 있다. 고객이 제품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끼는 일련의 과정들. 이 과정이 브랜딩과 직결되기도 한다.
우리가 마시는 위스키가 숙성되는 데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오크통 속 위스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 그래서인지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현재를 즐기는 일이 아닌, 마치 '시간을 마신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 느낌은 위스키 라벨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숙성 연수, 병입(甁入) 일자와 같은 숫자에서 비롯된다. 라벨에 숙성 연수를 표시하지 않은 ‘NAS(Non-Age Statement)'부터 8년, 12년, 15년, 18년, 21년, 30년 등의 숫자는 숙성 기간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나아가 병입이 오래된 올드 바틀(Old bottle)의 경우 수십 년 전 사람들이 즐기던 맛과 향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스키는 그 자체로 시간이 응축된 예술품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위스키가 우리에게 오기까지의 여정과 이야기는, 왜 위스키가 그만한 가격이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만든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요소는 소비자가 지갑을 열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간이 빚어낸 위스키는 그에 걸맞은 품격 있는 병에 담겨야 마땅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위스키의 매력은 맛과 향에만 있지 않다. 병 디자인, 라벨, 그리고 패키징을 통한 브랜드 메시지는 위스키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이는 각 증류소와 브랜드 스토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소비자와의 감각적 대화를 시작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위스키 각각의 고유한 디자인에는 저마다의 철학과 유래가 녹아 있다.
위스키 라벨은 정보를 담는 역할을 넘어 브랜드의 개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다. 굵고 강렬한 폰트, 혹은 유려하고 화사한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는 위스키 아이덴티티(Identity)를 한눈에 보여준다. 그래서 잘 디자인된 라벨은 정보 제공과 동시에 감각적 만족을 제공하고, 브랜드를 기억 속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타이포그래피는 단순 텍스트 이상의 힘을 가진다. 소비자는 라벨을 '읽는다'기보다는 '본다'라고 할 수 있다. 시각적 디자인은 구매 욕구를 자극할 뿐 아니라 브랜드를 더 오래 기억하게 한다.
위스키는 하나의 제품으로서 증류소가 전하는 이야기, 디자인이 불러일으키는 감정, 그리고 병 속에 담긴 시간의 무게(맛과 향 등)을 한데 모아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여기서 위스키를 '마신다.'라는 동사에서 '즐긴다.'로 바꾸게 해주는 건 디자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리미티드 에디션(Limited edition)은 브랜딩에서 흔한 개념이지만, 특히 위스키 시장에서는 그들의 스토리를 강조하고 고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마침내 구매를 하는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게 만들어 내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즐거운 경험이 위스키를 모으게 만들었고 어느덧 나는 위스키 수집가가 되어버렸다(덕분에 내 통장은 더 가벼워졌지만). 위스키 한 병. 그 안에는 단순한 술 이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어느 날 광고주를 대상으로 한 오프라인 세미나에서, 각 책상 위에 검은색 행사용 천을 덮어본 적이 있다. 평소와는 다르게, 참석한 광고주들의 자세가 한층 진지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라면 향을 없애기 위해 우디 한 룸 스프레이를 뿌려본 적이 있다. 그러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장소에 대한 첫인상이 달라지며, 단순한 세미나가 아닌 잘 준비된 컨퍼런스로 분위기가 변모했다. 위스키에서 얻은 힌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