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닐을 듣는다는 건 닦는 것부터 시작된다
다섯 살, 우리 집 좁은 거실 한편에는 커다란 인켈(Inkel)사 오디오 세트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 몸보다 커 보이는 거대한 스피커 우퍼에 발을 얹고 장난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우퍼가 찌그러지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마음이 아프셨겠지만). 그리고 오디오 세트에서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턴테이블(Turntable)이었다. 아버지의 진심 어린 관리 아래, 아크릴 커버 너머 보이던 바이닐(소위 LP판이라 불리는)과 카트리지는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유일한 존재였다. 날이 어둑 해질 즈음 조용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웅장한 클래식 음악. 가느다란 카트리지 바늘은 바이닐 위에서 붙어 있는 듯 떨어져 있는 듯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그리고 약 33 RPM으로 돌고 있는 바이닐 한쪽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는 작은 주황색 조명. 그 순간은 내게 아날로그 음악에 대한 애틋한 추억을 심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턴테이블은 사라졌지만, 오래된 국내 라이선스 바이닐만은 집안 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 기억 속에서도 잊히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을지로 3가 역 1번 출구 근처 골목의 한 작은 카페에 들렀다. 그윽한 커피 향과 함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80년대 바이닐 음악. 특유의 타닥타닥 하는 잡음과 아늑한 소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다섯 살 기억을 조용히 흔들어 깨웠다.
그날 이후 나는 앰프와 스피커가 내장된 작고 저렴한 턴테이블을 샀다. 별도의 포노 앰프(Phono amp)가 필요 없어 가장 심플하고 빠른 선택이었다. 그리고 잠들고 있던 바이닐을 조심스레 꺼내어 먼지를 닦아내고 턴테이블 위에 올렸다. 침묵을 깨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비록 조악한 스피커를 통해 들렸지만, 그 속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음악 속에서 다섯 살의 나와 지금의 내가 순간을 공유한다. 다섯 살의 나는 그 순간과 기억을 바이닐에 담아 두었던 것이었다. 그 이후 자연스레 바이닐에 빠지게 되어 회현역 지하상가에서 50~90년대 재즈와 락(Rock) 앨범들을 모으게 되었다.
바이닐은 단순히 음반(앨범)의 의미를 넘어서, 시간을 초월해 따뜻함을 건네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나는 바이닐을 수집하면서 나만의 작은 규칙을 정했는데 그건 바로 중고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들었던 사운드를 그대로 듣고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날 순 없어도 당시 환경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간접 체험을 하고 싶었다. 이런 특별한 경험에 매료되어 최대한 컨디션 좋은 중고 바이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컨디션 최상 제품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이며,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는 판 하나에 몇십, 몇 백만 원 그 이상을 호가하기도 한다. 즉, 최초 발매된 버전(1st pressing)에 가까울수록 오리지널 사운드와 패키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후 재발매된 버전보다 더 소장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온라인 경매와 발품을 팔아 어렵게 손에 넣은 한 장의 바이닐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과 손을 거쳐온 누군가의 추억의 조각들이었다.
바이닐뿐만 아니라 턴테이블, 카트리지, 포노앰프, 스피커 등 오디오 장비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역시 새 제품이 아닌 빈티지 제품을 고집했다 (뒤에서 소개할 빈티지 가구도 마찬가지지만 사실 이런 것들이 빈티지의 매력이고 특징이다). 현재 내 장비는 Braun사의 중고 PS500 턴테이블과 CEV-510 앰프다. 아직도 힘 있게 돌아가는 녀석들을 보면 기특하기도 하다. 오래된 것들은 관리만 잘하면 그 가치와 매력은 배가 된다.
바이닐을 수집하는 또 다른 즐거움은 앨범 자켓에서 온다. 앨범 자켓은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해 나는 특히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부터 레이아웃 구성, 콜라주(Collage) 등 크리에이티브(Creative) 요소들을 배울 수 있었다. 소장 중인 중고 앨범들을 쭉 진열해 보면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훌륭한 아트워크(Artwork)들이 많다.
재즈 대표 레이블인 블루노트(Bluenote) 사의 앨범들은 예술적인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세련된 디자인과 함께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블루노트 앨범 자켓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해 사운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레이아웃과 인물 구도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또 하나의 예로 재즈 바리톤 색소포니스트 제리 멀리건(Gerry Mulligan)의 Night Lights 앨범 자켓은 도시 야경처럼 차분한 웨스트코스트(WestCoast)의 쿨재즈 감성을 담아냈고, 일본 일러스트레이터인 나가이 히로시(Nagai Hiroshi)의 그림은 시티팝 장르 앨범의 특유의 감성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이렇듯 앨범 곡들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디자인과 매력적인 패키징은 수집 욕구를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다. 특히, 앨범 자켓의 크기는 이러한 매력을 한층 더 강조한다. 12인치 바이닐 자켓의 크기는 가로 세로 약 30cm 정도로, 아티스트들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바이닐 자켓들은 단순한 음반을 넘어 한 폭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턴테이블에 바이닐을 올릴 때, 자켓을 함께 세워두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시각적으로 임팩트를 주는 디자인은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그건 본능이다. 여기서 임팩트는 강렬하거나 혹은 섬세하거나 하는 등 다양한 표현들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조화롭게 그 컨셉 만큼은 명확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때론 주관적이면서 쉽지는 않다). 나는 동일한 조건에서 임팩트 있는 것을 보면 좀 더 쉽고 빠르게 결정하는 편이다. 아마도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행동 양식(Behavior)이지 않을까 싶다. 아름답고 이쁜 디자인은 더 구매하고 싶게 만들고 그 제품을 사는데 타당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때문에 심미성을 무시하면 안 된다.
'바이닐을 듣는다'라는 건 아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앨범 자켓을 꺼내어 읽거나 본다.
판을 꺼내서 마른 천으로 닦는다.
턴테이블 플레터 위에 판을 올린 후 전원을 킨다.
조심스레 카트리지를 올린다.
음악을 감상한다.
감상을 마치고 톤 암(Tonearm)을 정리한다.
판을 다시 앨범 자켓에 넣고 필요시 카트리지 청소도 한다.
이 번거로운 과정은 과거와 다르게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터치식). 하지만 나는 그 수고로움 속에서 오는 즐거움을 즐긴다. 판을 꺼내고, 먼지를 털고, 조심스럽게 턴테이블에 올리는 이 모든 행동은 음악을 듣는 것 이상으로 내게 여러모로 의미를 준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인다 했던가. 어떤 제품(혹은 행동)에 진심인 사람은 번거로운 과정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커피를 예로 들자면, 원터치 기계로 간단히 추출한 커피와 손수 내린 드립 커피는 분명 다를 것이다. 한 모금의 커피 속에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녹아 있듯, 바이닐 음악은 내가 거친 모든 과정의 흔적을 담고 있다.
버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디지털 양식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수고로움이 되려 재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소한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소소한 성취감과 재미. 그래서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즐길 수 있게 디자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왜 아날로그를 사랑하는가. 디지털 음악이 완벽에 가까운 사운드를 제공한다면, 아날로그 음악은 불완전함의 미학을 품고 있다. 바이닐은 타닥거리는 잡음과 미세한 흔들림이 있다. 소리골을 따라 물리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앰프에서 증폭되어 흘러나오는 따뜻한 음색은 디지털에서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만의 따스함이다. 때로는 불완전하고 느린 것들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세월의 흐름을 타지 않고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디자인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
소위 빈티지(Vintage)에는 '감성이 있다.'라고 한다. 우리의 지난 기억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과거 향수와 함께 다시 떠올리면서 재구성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감정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사람들 혹은 고객들로 하여금 무엇을 기억하게 만들지 디자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광고주를 대상으로 한 오프라인 행사가 딜레이 되는 상황이 있었다. 기다림에 지칠 수 있는 분위기를 고려해 90년대 유행곡을 선곡해 보았다. 그러자 공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맨 앞 대형 스크린에선 앨범 바이닐이 턴테이블 위에서 돌고 있었다. 그 시절을 공감하는 분들이 미소를 띠며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