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도의 불편한 진실
신규교사 K군은 처음 만난 6학년 아이들과 힘든 첫 주를 보냈다.
월요일 1교시, 아이들의 눈망울엔 졸음과 지루함이 가득하고, 공기는 무겁기만 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K군의 무리수가 시작된다.
"여러분! 선생님이 어제 일요일이 너~무~ 신나고 행복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몇 명의 아이들이 집중해주고, 눈을 크게 뜬다. '오늘 우리들을 만나서요?'라는 귀여운 대답을
기다리는 K군. 맨 뒤에 앉은 한 여학생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들며 말한다.
"여자 친구랑 '진도'나가서요?"
공부는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최고의 특권임에도 학생들에게는 왜 하기 싫은 의무처럼 여겨질까?
잘못의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가정에서는 부모님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학생들을 공부하게 만든다. 무슨 맛인지 궁금하지 않게 음식을 먹이고, 무슨 색인지 궁금하지 않게 옷을 입히며 말이다.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는 추임새는 꼭 빼놓지 않는다. 서두에 K군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야기 말미에 언급된 '진도'라는 것과 지금의 공부 문제를 연관 지어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진도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진도 (進度)[진ː도]
[명사]
1. 일이 진행되는 속도나 정도.
2. <교육> 학과의 진행 속도나 정도.
학교에서 '진도'는 교육과정의 진행 정도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만드는 행위를 소위 '진도를 뺀다'라고 표현한다. '진도'는 정도로 표현하지만 사실 속도가 중요한 요소이다. 빨리 뺀 만큼 남들보다 다른 것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학교에서는 진도를 잘 빼는 것이 중요하다. 왜? 학생이 교육과정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학생마다 다르지만, 무엇을 배우지 않았는 지는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이해시켰나가 아니라, 어디까지 가르쳤는가가 현재 학교의 지상과제라는 것이다. 가끔 열정이 넘치는 교사들은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을 위해 교육과정 진도를 바꾸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밀린 진도를 맞추기 위해 어느 날은,
자, 오늘은 대충 쭉 읽고
선생님이 정리해 준 학습지 풀자.
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쫓겨 아이들에게 화내고 잔소리도 하게 된다. 뒤쳐지는 아이를 봐줄 여력도 없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이중성이 가지기 시작한다. 교과서 펴는 날은 지루한 거 하는 날, 교과서를 덮는 날은 신나는 거 하는 날.
"자, 오늘 어디 배울 차례지? 교과서 펴자."
"아~앙~"
"갑자기 왜 한숨들 쉬고 그래?"
"선생님, 저번 시간처럼 '놀'면 안돼요?"
"저번 시간에 논 거 아니야, 그것도 교과서 배운 거야..."
"그때는 교과서 안 했는데..."
빨리 빼야 하는 학교
물론 교육과정과 연계해 교사의 아이디어와 학습목표를 관련지어 달성하려는 시도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교과서의 내용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왜? 평가 때문이다. 기억하는가? 초등학교에서 0교시를 하고, 성적이 오른 학생을 불러다 돈을 쥐어주던 그때를 말이다.
(이미지 출처, MBC 뉴스투데이 2009.7.10 방송)
http://imnews.imbc.com/replay/2009/nwtoday/article/2384513_13199.html
전국에 불어닥친 이 '평가'로 학교는 더욱 진도에 집착하고 더 빨리 진도를 빼야 했다. 그리고 학습지를 풀고 또 풀어야 한다. 이 때 아이들과 무슨 프로젝트 수업을 하고 있으면 바로 관리자에게 불려 간다.
"어이~ K선생, 당신만 참 교사야? 그거 시험 끝나고 해도 되잖아. 학교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해서야... 뭐가 중요한지 그렇게 모르나? 쯧쯧.."
이런 상황을 겪었을 법한 교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학교는 평가를 통해 인정받고, 그 평가는 교사의 진도 빼고 닦달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그리고 시험은 교과서와 학습지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치른다. 잘 생각해보라. 번듯한 기업 이미지를 위해 희생하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참, 불공정한 거래다.
재미있는 사실은 불공정 거래를 뒤에서 적극적으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 교육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왜 이렇게 학생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우리 아이는 반드시 남들보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우리 아이는 반드시 남들보다
빨리 도착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은 사교육 시장을 번성하게 만들었다. 학원이 생존할 수 있는 까닭은 '선행학습' 때문이다. 남들보다 빨리 배우면 그만큼 경쟁력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같이 빨리 배우다 보니'인성 학습', '리더십' 등 갖가지 형태의 '선행'이 생겨났다. 2015년, 대한민국 학생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할 기회와 여유도 얻지 못한 체 '진도'의 철길 위를 쌩쌩 달리고 있다.
빨리만 가면 된다는 '속도 지상주의'는 어른들이 조장한 사회 경쟁에 다시 어른들이 말려들어 공부로 인한 불행을 대물림하는 씨앗이 된다. 사회는 부모를, 부모는 학교를, 학교는 교사를, 교사는 학생을 괴롭힌다. 우리가 일구어 놓은 경쟁의 텃밭에서 불행의 씨앗으로 싹트는 학생들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까?
현재 초등학교 현장에서 '일제고사'는 사라졌고, 지필평가도 차츰 사라지는 추세이다. 그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어떤가? 바로 이렇게 경쟁으로 내던져도 되는 학년인가?
진짜 살아있는 학교와 공부를 위해 우리는 먼저 '속도 지상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학년을 설득해야 하고 학교를 설득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있는 관리자의 도움도 필요하다.
이것이 어렵다면 우선, 학급 속에서 잠재되어 있는 경쟁 문화를 찾아내어 제거하고 '너도 잘하고 나도 잘하는' 것을 찾아내도록 해야 한다. 교과서를 보고 시험 걱정을 하지 않고, 교사가 들고 들어오는 종이뭉치를 보고 겁을 내지 않게 해야 한다.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평가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평가'에 도달하는 과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점 중 '속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경험이 공부라면, 우리 학급에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오게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똑같은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속도 지상주의'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속도 지상주의'의 괴물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학력저하 우려'라는 바람을 타고 날아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교사와 학교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노하우를 쌓아두어야 한다. 착한공부는 이런 바탕 위에서 시작할 것이다.
"빠르게"가 아닌 "바르게"에서 말이다.
*다음 시간에는 학생들과의 공부이야기가 펼쳐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