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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착한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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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민 Sep 20. 2015

선생님, 공부를 왜 해야 하죠?(3)

 (3) 우리의 공부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

의욕도 상실, 체력도 상실. 모든 것이 무기력한 학생 A는 학교 가는 길이 힘들다.
가방도 무겁고, 눈꺼풀도 무겁다. 초점 없는 눈을 볼 때면 같이 안드로메다로 가는 기분이다.
멍 때리기 대회가 있다는 데, 나가면 단연 압도적인 1등이다.
"오늘,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끝나면 바로 학원가 야해요."
"10분이면, 아니 5분이면 돼"
"네..."

누가 12살의 어깨에 이런 많은 짐을 주었을까? 둘이 마주 앉았다.
"A는 꿈이 있니?"
"...."
"그럼 하고 싶은 건 없어?"
"...."
선생이랍시고 꿈을 통해 동기부여 한번 해보고자 했는데 전혀 먹히지 않는다.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너는 문제일까?' 아니다. 방향을 바꾸자.

"A는 학교에 가니? 아니면 가드리니?"



  A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우리는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개인의 내부적인 것에서만 찾는 경향이 있다. 성공하지 못한 이유와 실패하는 이유를 '개인적인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꾸짖고, 꿈이 없고 용기가 없어서라고 말한다. 그럼 나와 당신에게 되물어 본다.


지금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꿈이 없거나 하고 싶은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걸 내뱉기가 쉽지 않아서다. 이미 직장과 돌봐야 할 가족이 있고, 돌아가기엔 멀리 와버렸다 생각하고 가진 것을 놓고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어서이다. 그래서 성공담과 자기계발서를 보며 대리 만족한다. 우리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왜 학생들에게 던지는가.  필자는 A가 왜 "꿈과 하고 싶은 일"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는가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이 이야기의 실마리는 마지막 질문에 있다.


"당신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살아 드리고 있습니까?"





꿈을 강요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

1편에서 공부는 살면서 만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삶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이므로 일종의 생존 수단임을 밝혔다. 이것이 실제로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후에 다루어 볼 것이다. 2편에서는 "왜 학생들이 인간 최고의 특권인 공부를 하기 싫은 의무로 여기게 되었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학교'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속도경쟁주의'를 이유 중의 하나로 언급했다. 이번에는 '공부'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노력'의 문제일까에서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A의 대답은 내가  그동안 교사로서 얼마나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시켜 주었다. '공부'가 하기 싫은 이유가 '게으르거나', '교과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꿈이나 희망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생을 다그치고 설득하고, 훈계했다.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럼, 공부 해야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꿈이나 미래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여전히 발랄하고 순수한 직업들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꿈이 없거나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일일까?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면 "우리 아이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해요." 하고 걱정하고, 심지어 "커서 뭘 하면 좋을까요?" 묻기도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거칠게 표현해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많던 아이들의 직업이 학년이 높아질수록 획일화되어 간다.



  당황한 학부모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부모인데..."하며 곤두선 모습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신경을 쓴다는 것의 의미는 '학생을 믿고 지지해 주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부모가 만든 꿈과 희망에 어떻게든 탑승시키고 순항시키는 것이 '신경'쓰는 일이 된다. 그렇기에 그나마 초등학교 때는 다양했던 꿈들이 고등학교에 와서는 특정 직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어차피 내 배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섬을 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열심히 노를 저을 필요가 있나?


  하지만 학생들은 노를 젓는다. 정확히 말하면 저어 드린다. 공부가 의무가 되고 사춘기에 부모와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노예가 주인과 체격이 비슷해지고 주인의 지적능력이 나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노를 집어 던지고 반란을 일으키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꿈과 희망을 강요하는 일이 오히려 학생들의 순수한 동기를 망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과도한 의도가 오히려 무엇인가가 되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없어지고 꿈과 희망만 남는다. 멋진 옷은 입었지만,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마네킹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꿈이 없고 하고 싶은 게 없을 수 있다. 당연히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 '미래'가 아닌 지금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자.


너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하니?

 





나를 향한 공부, 착한공부

  '학교와 학원을 가 드리는' 학생들에게 공부는 하기 싫은 의무이다. 그것은 공부의 방향이 '내'가 아닌 '누군가'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꿈과 희망'을 강요받고, '나'를 생각해 볼 기회와 시간이 없다. 이렇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근본적인 물음에 빠진다.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가?


 그렇기에 어차피 부모가 정했거나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꿈이 뭐냐? 장래 희망이 뭐냐?" 대신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를 물어봐야 한다.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부모와 교사가 진정으로 '신경'써야 하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알 수 있고, 그 행위가 수많은 '공부'중 하나가 된다면 학생에게 공부는 '행복한' 일이 된다. 그 공부가 학교에서도 이루어진다면 학교 가는 길이 '행복한' 길이 된다.


  착한공부는 세상의 모든 공부를 '스스로'하고 '재미있게'하고 '함께'하자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든 낱말이다. 기존의 '나쁜공부' 생각을 깨뜨리고 나를 향한 진짜 공부, 착한공부로 만들어 학생들이 삶 속에서 공부를 의무가 아닌 행복하기 위한 사회적 생존수단으로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착한공부로 공부 마음이 변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통해 계속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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