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착한공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민 Jun 07. 2016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5

교실속 문제 상황 프레임 다루기(1)


지난 글이 문제인식에 관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실전편'쯤 되겠다.






프레임에 휘둘리는 교사

지난 이야기(http://goo.gl/ugSuP4)에서는 프레임과 패러다임, 교실 속에 존재하는 프레임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아래에 나열되는 주제와 사례는 교사 개인의 생각과 경험에 따라 그 해결과정과 결과가 다르게 나오기 때문에 정답을 찾는 과정이 아닌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교실 속 당신이 서는 곳은 어디인가? 한번쯤 학생의 책상에서 교실 복도 창가에서 교실을 바라보자. 그리고 당신이 서는 곳을 바라보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어야 나를 이해하고 학생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양한 면을 갖고 있으니까.


  

웹툰 '송곳'의 명대사






프레임 #1

 "수업은 언제나 '성공적'이어야 한다?", 완성품이 아닌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수업을 통해서 학생들이 항상 무엇인가 얻고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성공적'인 수업을 위해 완벽한 기획과 준비를 한다. 오해하지 말자. 준비가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것은 '나의 준비'가 곧 수업의 성공을 보장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다. 내가 준비한 '성공적'인 수업과 학생들이 받아들이는 결과는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공들여 준비한 수업일수록 내용을 잘 따라가지 못하거나 방해하는 학생들을 용납하지 못한다. 실패하지 않으려는 욕심이 교실과 수업을 실패로 이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초부터 실패가 예상되는 수업을 생각해 본다. 아이들에게 그냥 던져주는 것이다. 시간은 낭비되고 교육적으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는 것이 있다. '질문'이다. 왜 실패했을까?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성공하는 수업'에는 질문이 별로 없다. 아이들은 단지 '재미있었다'라고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니, 실패가 예상되는 수업을 해보자. 삶에서 무한한 실패와 실수가 허용되는 곳이 있다면 바로 학교일 것이다. 먼저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하자. 성공했을 때보다 실패했을 때 더 칭찬하고 격려해주자. 성공하는 방법을 알아도 일부러 돌아가게 실패하는 방법을 찾고 느끼게 해보자. 


학교교육이 완제품 교육이 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다. 미완성의 인생이다. 그러나, 학교교육을 마치면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완벽한 인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마치 학교에서의 작은 성공이 사회에서의 큰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 마냥 말이다. 그러나 교사부터 시작해서 제도, 학생까지 모든 것이 불완전하며 실패 가능한 요소이다. 우리 교실은 충분히 실패해도 된다. 역설적으로 나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공'이 된다고 생각한다.




프레임 #2  

우리학급 학생들은 너무 발표를 안한다?, 학급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를 말한다.


당연하게도, 매년 학급이 같은 분위기일 수 없다. 학생이 바뀌고 교육과정이 바뀐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교사(나)가 바뀐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이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는 여전히 열심히 하고, 여전히 열정적인데' 학급의 문제는 '그 녀석, 그 무리들' 때문이다. '작년에 분위기가 안좋았다는 데 역시나 올해도 그렇구나'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문제가 없는 학급은 없다. 어느 단체, 조직에서나 열심이, 긍정이, 투덜이, 부정이, 과잉이, 무기력이가 있기 마련이다. 교사가 어떤 프레임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제가 문제가 되고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한다.


영화 베테랑의 한장면, 문제를 삼기 시작하면 모든게 문제가 된다.




몇 해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발표도 안하고 의욕이 없다고 느꼈을 때 '왜 이럴까?' 고민한 적이 있다. 문제를 학생들에게만 찾았다. 사춘기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혹은 작년에도 의욕이 없었다고 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도 수업시간에도 떠드는 모습을 참지 못했다. 교실 속에서 발언에 대해 자유로운 분위기와 왁자지껄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수업 장면에서는 활기를 띠기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다시 마음껏 떠들어보라고 해야 할까? 혹여 이것이 학생들이 가진 당시의 학급 문화이 거나 특징이라면 그것은 그대로 존중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냥 학생들에게 사과했다. "수업시간에 발표 잘 안한다고 잔소리 했던 나를 반성한다.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하자. 너희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어." 우리 학급은 활기가 없는 반에서 집중력이 좋은 학급,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학급으로 바뀌었다. 사실, 아이들은 바뀐 게 없었다. 내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프레임 #3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듣니? 규칙은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대의 문제이다.


학급살이에 있어 교사를 가장 고단하게 하는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상습적으로 규칙을 지키지 않는 학생의 생활지도 때문이다.

신규로 발령받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완벽한 학급규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각종 자료를 분석 비교하여 12페이지 분량의 학급규칙을 만들어 '반포(?)'하고 지키게 하였다. 2학기가 되자, 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어떤 일이 생겼을까?


학생들은 규칙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생활 장면 하나마다 규칙과 부딪치게 되었다. 사소한 행동도 규칙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모든 판단의 몫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선생님, 00이가 또 규칙을 어겼어요!" 나는 당황했다. 그 규칙을 만들기는 했어도 나의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기에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말 그런 규칙이 있어?" 학생이 어긴 규칙은 '책을 거꾸로 꽂지 않는다' 였다. 갈수록 학생들은 날카로워지고 공격적이 되어 갔다. 나는 결국 규칙의 대부분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교실에서 책상과 책상 사이를 위험하게 쫓아다니는 두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부분의 교실은 '교실에서는 뛰지 않는다'라는 규칙이 있을 것이다. 교사는 두 학생을 불러낸다. 

"교실에서는 뛰지 않는 게 규칙이야. 그러니 둘은 규칙을 어긴거야." "네"라고 대답하고 학생들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런데 다음 시간, 둘은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교사는 이제 화가 난다. 분명히 방금 전에 규칙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학급의 긍정적인 문화를 저해하는 행위이다. 교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화를 낼 준비를 한다. (의도적 화냄이라고 할까?) 두 학생을 다시 불러낸다. "뛰어다니지 말라고 했지!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듣니?"


한참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들여보낸다.

 그날은 괜찮았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뛰어다니는 둘을 보게 되고 교사는 폭발한다. 

우리는 사회에 태어나 사회 속에 살아간다. 사회는 다르게 말하면 약속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하기로 약속한 집합 속에 사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내가 그 약속을 바꿀 기회도 없고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투표권과 참정권이 생기면 그 약속을 바꿀 수 있는 기회와 권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갑자기 주어진 기회와 권리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학교에서 그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교실에서는 뛰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일까? 이 규칙을 처음 만들 때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과 권리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교에 입학해 보니 그런 규칙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규칙이 만들어졌고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의 과정을 경험과 대화로 나누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신에게 묻는다.

 "왜 교실에서는 뛰지 말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는 교실과 복도에서는 마음껏 뛰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 뛰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까? 그렇다면 운동장, 강당에서도 뛰어서는 안된다. 


위 이야기는 실제로 교실에서 왜 뛰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지는 학생과의 대화과정이었다. 


학생은 버릇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규칙제정의 이유을 느껴보지 못한 것일까? 


10년전만 해도 대부분의 장소에서 흡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의 장소가 금연 구역이 되었다. 그러한 약속을 정하기까지 많은 연구와 사례가 있었고, 국민들은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 학급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의 도덕성이나 버릇의 문제가 아닌 해당 규칙에 대한 '감수성'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바꾸어 보아야 한다. 학급규칙에 대한 학생들의 토론과 토의를 통해 수 십번 규칙이 바뀌더라도 그 자체로는 매우 의미있고 놀라운 경험이 될 것이다. 실제 우리의 삶이 그러한 과정 속에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편에서는 학생들끼리 이루어지는 편견과 문제, 교사와의 대립을 프레임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