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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민 Jun 09. 2017

#56 청킹맨션에서의 일일

2017.2.24.

이번 방학에는 머리 털나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거의 조선시대 선비가 신문물 보는 것처럼 다녔다고나 할까. 홍콩은 어릴 적 나의 꿈같은 도시였다. 영웅본색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친척 형과 함께 부모님의 심부름이라고 거짓부렁을 하고서는 빌려온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을 비디오로 보며 집에 있는 이쑤시개를 잘근잘근 씹어본 나였던 것이다. 

짝꿍이 나에게 핀잔을 줬다. 무슨 이상한 노래를 자꾸 흥얼거리냐고. 장국영의 당년정을 알려나 싶다. 홍콩영화의 광팬이었던 내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은 중경삼림의 배경이 되는 청킹맨션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싶은 게, 입구부터 덩치 큰 중동계 사람들로 가득했다. 짝꿍의 손을 꼭 잡고 안을 둘러보는 데 그 사람들의 시선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인종차별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청킹맨션의 허름함과 여기저기 서성이며 우리를 위아래 보는 시선들 틈에서 숨도 크게 쉬기 힘들었다. 이곳저곳을 보겠다는 다짐은 생각 저 멀리 사라졌고, 곧 맨션을 빠져나왔다.

그 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하나의 찌릿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 전 여성 혐오와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때를 기억한다.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생각에 마음은 이해하지만 논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은 '남성'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왜 청킹맨션에서 같은 남자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는가? 왜 그들이 나에게 '잠재적 범죄자'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는가? 그 어두운 환경과 그들의 존재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데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나에게 아무런 악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느낀 걸 어쩌겠나. 

대한민국의 여자들이 남자들에 대해 충분히 자신을 보호하기 어려운 환경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이 가득 찬 버스, 지하철, 새벽의 택시, 조명이 깜빡거리는 골목길, 그냥 모여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 무리들.

잠재적 범죄자의 용어가 자극적일 수는 있지만, 그 생각과 감정의 발로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그리고 이 생각들이 이런 똑같은 상황이 나보다 한참은 작고, 어쩔 수 없이 갇혀 있는 공간에 놓여 있는 한 존재들에게로 이어졌다. 만약, 학생들이 교사들을 '잠재적으로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언어를 수용할 수 있을까? 

청킹맨션 속 나와 나보다 약한 존재로 가득한 교실과 오버랩되며 섬뜩한 기분이 든다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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