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는 때때로 우리를 눈물겹게 해
지금까지 복잡한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난 스스로를 어떤 문장으로 정의 내리고자 했다. 물론 스스로의 감정을 짧은 시간에 정확히 인지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의 빈도는 점점 높아졌다.
사람의 감정이란 뭐가 그리 복잡한지 난 자주 뇌 속의 시냅스 속에서 일어나는 전기 신호일 뿐인 화학적 작용에 잠식당한 감정의 숙주가 되어 깊은 계곡의 끝자락에 대롱대롱 걸려있었다. 그 느낌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얕고 때로는 깊은 우울감 속에서 살아온 지 10년 하고도 몇 년이 지났다. 사실 지금의 나에겐 너무 익숙한 느낌이라 심각성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극복해낼 것이라고 믿었고, 꽤 힘든 시기에도 약간의 시간들을 지나 어떠한 이유가 정의되기 시작하면 조금씩 회복하기도 했다.
가끔은 나 자신의 감정과 대면하는 일을 회피하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잘 살아보려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내가 나 스스로를 돕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확신이 들기 시작할 즈음, 상담센터를 찾았다.
첫 방문 때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만 1시간을 꼬박 채웠다. 생판 모르는 상담 선생님께서는 그저 공감해주시고 이따금 보충할 점들을 물어보기만 하실 뿐 별다른 말은 없으셨다. 눈물이 한 시간 내내 흘렀다. 울고 싶을 때는 그다지도 말라버렸던 몹쓸 눈물들이 그제야 터져서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담 선생님이시니까, 전문가는 다르니까 그랬던 걸까.
어떤 이유에서였건 그분은 가족들보다도 더 함께 분노해주고, 나의 버팀에 대해 인정해주셨고 그게 많은 힘이 됐던 것 같다.
요즘 별 것 아닌 따스함들에 자주 울컥한다. 어떤 이에게 감정의 공명을 느끼는 일의 빈도가 점점 줄어드는 팍팍한 어른의 삶에 다다른 걸까.
마냥 흩날리는 봄바람이 같은 이가 아닌, 음지를 품고 있는 은은한 햇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이미 마음속에 또 다른 내가 울고 있다. 그리고 아닌 척 시선을 피하는 내가 서있다.
이제 울고 있는 내 안의 그 아이를 돌봐주려 한다. 울컥하는, 시선을 피해버리는 벌써 훌쩍 커버려 어른이 돼버린 나를 안아주려 한다.
눈물이 말라버려 속으로 울던 나를 마음껏 슬플 수 있게 달래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