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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Sep 13. 2020

02. 이름도 예쁜 나의 첫 필름 카메라, 미놀타

장롱 속 카메라가 없더라도 괜찮아


성인이 되어 제주에서 코닥의 일회용 카메라를 접한 이후, 난 나만의 필름 카메라를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 직후라고 하기는 조금 긴 시간인 세 달 정도가 지난 후였지만, 여행에서 잠시 경험했던 필름 카메라의 결과물들이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그 어떤 끌림이 지속되는 이유에서였다. 그 끌림은 아주 생소했지만 지금보다 그때 더 강렬했다. 필름 카메라의 여러 가지 면들이 좋았다. 아니, 싫었던 점 하나 없이 마치 맞춘 옷을 지어 입은 것처럼 모든 면이 딱 들어맞았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필름 카메라를 유행처럼 사용하던 시기가 아니어서 구입할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거려보니 몇 군데 있긴 했지만 많은 종류의 카메라들 중에서 어떤 카메라를 구입해야 좋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디지털카메라나 휴대폰 카메라로 자동 세팅을 맞추어 버튼만 눌러 찍기만 했던 카알못의 내가 혹시나 덜컥 구매했다가 장롱에 보관하게 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장롱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이해한다면, 아마 나와 같은 연배의 사람이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예전엔 카메라가 일반 회사원의 3달치 봉급 수준의 고가 물건이었기 때문에 귀중품 대접을 받던 때여서 카메라를 장롱 속 이불에 꽁꽁 싸서 숨겨놨었다. 그래서 요즘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이 쓰셨던 카메라를 발견해서 사용하는 이들은 필름 카메라를 ‘장롱 코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적어도 몇십만 원을 아낀 일이 되는 데다, 나를 아는 어른이 쓰던 물건을 물려받아 쓴다는 의미부여로 감동하게 되는 물건 중 하나가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좀 부럽기도 하다. 아쉽게도 나의 아버지가 쓰던 미놀타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일단 검색한 필카 이미지들 중에 나의 취향에 맞는 색감의 이미지를 추리고, 그 이미지를 찍은 카메라 모델을 찾아서 하나씩 검색하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고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색감은 밝고 뽀얀, 맑은 이미지가 많았다. 이미지들을 추리다 보니, 자연스레 몇 가지 카메라로 선택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색감 이외에 카메라의 디자인이 클래식할 것, 사용방법이 아날로그적이면서도 간편할 것, 가격대가 높지 않을 것 등의 조건들을 추리다 보니 자연스레 만나게 된 카메라가 바로 '미놀타 X-300'이었다.

미놀타라니, 이름은 어쩜 이렇게 이쁜가? 생김새 또한 상상했던 그것과 비교했을 때 손색이 없었다. 드디어 나와 함께 할 첫 필름 카메라가 정해지는 순간 마음이 벅차올랐다. 설레는 마음에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중고제품들 밖에 없다니, 혹시나 카메라가 오지 않고 사기를 당하진 않을까? 금방 고장이 나진 않을까? 이미지와는 다른 카메라가 오지는 않을까? 소심한 성격에 걱정을 얼마나 했던지. 첫 카메라를 그렇게 오매불망 고르고 고르다 선택한 후 기다리기를 며칠, 드디어 조우하게 된 미놀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인 카메라였다.

처음 미놀타가 내게 왔을 때 빨리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서 미리 준비해놓았던 필름을 겨우 끼우고, 잠든 머리맡에 두고 선잠을 잤던 그 기억은 마치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모르던 그 감정과 닮아있었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그림자를 촬영해보았다


다음 날 출근하는 곳이 학교여서 수업시간보다 일찍 발걸음을 하였는데,  정규 일과가 끝나고 빈 복도의 끝에 난 창을 통해 내려오는 햇살이 예뻐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홀린 듯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36컷을 채우는 시간 동안, 평소 한 없이 무료했던 자투리 시간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수업 직전 부랴부랴 움직여 수업 준비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고 끝내기 바빴던 내가 그 시간들을 온전히 누리고 싶게 하고 누릴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사실 그 이후로 카메라를 세 번이나 교환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중고 제품이다 보니 점검을 마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물건들도 배송 중에, 배송된 후에 고장 나는 일이 잦다고 한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정말 울고 싶었다. 하지만 충분히 그 점은 이해했었기 때문에, 최대한 신속하게 협조하였고 세 번째 택배를 받고 나서야 온전한 미놀타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사용되지 못했던 섬세한 기계로 태어나 방치되었다가 갑자기 움직여야 했을 미놀타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카메라의 입장이라니. 카메라가 점점 의인화되거나 반려화 되어서 감정이 이입되기 시작한다면 당신 또한 미놀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리라.


난 이미 중증이 아닌가 싶은, 나만이 상상하여 떠올려보는 이미지가 있다. 입 안으로 조용히 "미놀타."하고 카메라의 이름을 굴려보면 예쁜 울림으로 울린다. 내 카메라를 그 이름을 닮은 사람으로 의인화해보면-그러니까 만약 사람의 모습이라 가정해 본다면-마치 흑요석 같은 까맣고 차리한 머리카락을 단정히 늘어뜨리고, 맑은 동공을 반짝이며 말이 없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소녀가 떠오른다. 어쩜 카메라에 착 붙는 이름을 이렇게 절묘히 지었을까 싶을 정도다. 난 어쩌다 이다지도 이 카메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장롱 속 카메라가 없어도 괜찮다. 당신의 애틋한 마음 하나로 충분히 그 카메라는 당신의 오랜 친구로 존재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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