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럴듯한 제이 Sep 27. 2020

06. 카알못들을 위한 용기를 그대에게

때로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때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01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첫 시작이 유난히 힘겨운 사람들이 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던가. 학창 시절 나는 '시작이란 반에서 더 나아가 거의 다다.'라고 느낄 정도로 스타트를 끊기가 힘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잘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잘 해내고, 그 결과물이 나의 기대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기를 바랐다.


어떤 일이든 처음부터 능숙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시작이 힘들었다. 시작하기 전, 강박적으로 무수한 사전 정보와 여러 대안들을 만들어놓아야 속이 편한 피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지만,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의식하며 노력하는 편으로 바뀌었다.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 중 대부분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심리학적으로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면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작을 미룬다. 자신이 자신의 실패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조차 잘 해내지 못하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 앞에서 남들은 의연하기를 바랐다는 점이었다. 새로움 앞에서 떨고 있는 그들에게 아주 그럴듯한 말로 응원해주며 위로하는 일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능청스레 잘 해냈다.

물론 그 마음만은 진심이었지만, 남에게 쉽게 하는 ‘일단 시작해봐, 넌 할 수 있어.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따위의 말들을 나 스스로에게는 해줄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참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남들에게 하는 따듯한 위로의 말을 자신에게는 잘 건네지 못한다. 다들 하나같이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냉정한 것이다.


떠올려보면 여태껏 내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은 모두, 내가 남들보다 잘하거나 나 스스로가 능숙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또한 완벽주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잘하는 것에서는 일단 평타 이상은 먹고 들어갈 수 있으니 그만큼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적어지므로 안전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하고 싶어 했던 일에서만큼은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은 투지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본래 경쟁심으로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동기를 가지는 것에 조차 어려움을 느꼈었다. 예체능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후로 동기부여가 잘 이루어지자 그다음은 쉬웠다. 하고 싶은 일에 뜻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그쪽으로 쏟아부어 성악 공부를 했으며, 가고 싶은 학교를 가기 위해 학업까지 적당한 선에서 손 놓지 않고 병행할 수 있었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은 그 나이 때를 지나는 이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 이런 일 저런 일을 겪으며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검은 때에 점점 찌들다 보면, 순수한 열정이 빛바래고 희미해져 남루한 모습으로 겨우 한쪽 끄트머리가 달랑달랑 붙어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게 될 확률이 크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주처럼 느껴지기도 할 때가 바로 이런 때이다.

사람들은 그런 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또는 또 한 번 열정의 온기를 품어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할 어떤 명목을 찾기 위해, 자신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취미든 사람이든 또 다른 일이든 간에 순수한 열정에 다시 불씨를 지펴 줄 낙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20대 후반의 난 감정적 노력과 신체적 활동에 대한 일말의 의지 조차 소진된 상태였고, 어쩔 수 없이 당장 오늘을 지내기 위해 해야 하는 밥벌이 정도만 해내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냈었다.

그 창창한 나이 때 생에서 겪어내는 최악의 감정들을 다 겪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최악의 시기를 겪어냈다. 이게 바닥이겠지 싶으면 또 바닥이 무너지고, 또 이젠 끝이겠지 하면 어김없이 그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무너져 내렸다. 그땐 내 삶이 나를 조롱하는 듯했고, 그저 휴식과 수면을 취하는 일 만이 나를 구원해주는 나날이 이어졌다.


듣고 말하는, 노래하는 일들로만 채워졌던 삶이 급격히 변화하며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건강상의 이유였다.

20대 중반, 대학을 갖 졸업하고 서울 노량진으로 올라가 임용고시를 준비하다가 2년째 초반 집안 사정으로 인해 고향으로 내려왔었다. 이후 당장에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으므로 곧바로 LG 에어컨 공장에 3개월 간 일을 하러 갔다. 그 시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당시 친구가 있던 시립 합창단에 TO가 날 수도 있다는 정보를 얻어 열심히 3개월 간 돈을 모으며 생활비와 레슨비로 충당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천식에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원래 기관지가 약하긴 했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고, 큰 문제없이 20년 넘게 생활해왔으니까. 하지만 레슨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노래를 하기 위해 호흡을 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심각한 기침이 계속해서 올라왔고 노래 한 음절을 뗄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루아침에 내 정체성과도 같았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비록 소름 끼치게 노래를 잘해서 합격은 따놓은 당상인 유력한 후보는 아니었지만, 일말의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하던 공부조차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내려온 나에게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던 합창단 시험이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건강문제까지 겹치니 무기력증과 함께 새벽만 되면 부어오르는 기도에 겁이나 숨을 꺽꺽 거리며 밤마다 많이 울었다. 이제 나는 끝인가 싶을 정도로 이후의 삶은 그려지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깊은 우울감과 회의감이 엄습할 뿐이었다.


그 이후로 거의 일 년간 방황했다. 그래도 밥벌이는 해야 하니 국가지원사업으로 틈틈이 CAD 자격증도 따고 취업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없었다. 당시 부모님은 이혼한 상태로 다른 배우자와 함께 생활하는 중이었고, 말하자면 긴 사정들로 10년 넘게 지나온 세월 속에 길들여졌던 난 그렇게 버텨내려 애쓰고 또 애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좋은 기회로 베트남 하노이에 거주하는 한인 자녀를 대상으로 한 놀이학교 담임 선생님(그리고 방과 후 우쿨렐레 강사)으로 1년 동안 다녀오게 되었는데, 베트남 북부 기후 특성상 습한 공기가 지속되어 기관지 환자들에게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우연히 만나게 된 기회와 더불어 그곳에서 반년 간 함께한 일본 합창단과의 생활이 나에게는 재활훈련처럼 노래를 다시 할 수 있는 계기와 연습량을 만들어주었고 그 후 천식도 점차 좋아지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면역력이 떨어졌던 이유도 공장 일을 다니면서 생긴 나쁜 식생활 습관들로 세 달 만에 거의 10킬로 정도 살이 쪘던 것이 한 몫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알레르기성 비염을 어렸을 때부터 달고 살면서 제대로 내 몸을 관리하지 않은 나의 탓도 컸다. 어딘가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고, 나 자신을 방치했던 시간이 길었다. 젊고 건강할수록 더 잘 챙겨야 하는 게 건강이라는 것을 건강한 시절에 깨닫는 이들은 드무니까.


그렇게 한결같이 바닥을 찍고, 또 찍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다 보니 나에 대한 자존감 또한 거의 바닥을 쳤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에 점차 흥미가 떨어졌던 시기도 이때 즈음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음악강사 일을 시작하면서 음악에 대한 권태기가 더욱 심해졌다. 본질은 흐려지고 세속적인 목표들만 남아서, 이력을 채우고 돈을 버는 일에 급급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가르치는 일에 대한 보람은 있어서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즐기면서 했던 시기가 길었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사실 일보다는 사람에게 지친 이유도 컸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들에 집착했다. 적어도 경력과 돈은 나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3년쯤 지나자 나 자신이 소모되는 기계 부품처럼 느껴졌다. 기계 부품은 새 부품으로 갈아 끼울 수 있으니, 내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다른 이로 대체될 수 있는 자리에서 그저 소모되고 사용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삶의 형태는 무수히 많을 것이고 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이들도 많을 것이지만, 대충 이쯤 되니 나 자신이 대한 신뢰감도 탄탄할 수가 없었다. 의지가 없어지니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일과 집을 반복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만 남아 그저 버티고 살아내는 일에 급급했다.


겨우 그 정도가 나에게는 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야 되는 이 만큼이 되고 나니 그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다. 그나마 일 년에 한두 번 떠나는 짧은 여행이 나의 숨통을 트여주는 역할을 하였고, 사람처럼 살 수 있도록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유일한 행위였다.


 

-다음 편에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05.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름 카메라 유저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