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지만 연차를 쓰고 집에서 쉬던 늘어지는 휴일, 더 늘어지는 낮잠을 자고 거실로 나온 아내가 소파에 누워있던 내게 말했다.
"저녁은 떡볶이 해 먹을까?"
이틀 전 처가에 다녀왔을 때 장모님이 떡볶이 소스와 떡을 챙겨주신 게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떡볶이를 만들고, 나는 집 근처 중심상가에 나가 튀김집에 가 모둠튀김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마침 딱 떡볶이가 완성되었다. 정말이지 완벽한 역할분담이다.
떡과 어묵을 한 포크에 같이 찍어 입으로 배달한다. 그래, 이거지. 이게 인생이지. 장모님이 주시면서 "이 소스 진짜 맛있더라."라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모둠튀김 더미에서 왕새우튀김을 집어 간장을 적당히 묻힌 뒤 새우 머리 부분을 와그작-씹자, 기억의 상자 제일 안쪽 구석에 놔두어 곰팡이가 슨 것들 몇 개가 갑자기 떠오른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맞은편에는 동네 랜드마크(?)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큰 문구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거기가 동네에서 가장 핫한 떡볶이집이었고 우리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거의 다 그 집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그 떡볶이는
바로 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여기에 떡볶이 한 접시가 먹음직스럽게 나오곤 했다. 한 접시에 단돈 1,000원이었다.
그 떡볶이는 내가 살면서 최초로 맛있다고 느낀 떡볶이였을 것이다. 나는 떡볶이의 새빨간 국물을 사슴 피(...)라고 불렀다. 지금 어른의 시각에서는 우스운 소리지만 당시 나는 초등학생이었음을 감안해 주길 바란다. 그런데 왜 하필 사슴 피였을까? 그 이유는 아마 그 시절의 나만이 아는 영원한 비밀로 남을 것 같다.
사람들은 그 떡볶이집을 '못난이 아줌마네'라고 불렀다. 사실 그때는 왜 못난이 아줌마가 못난이 아줌마라고 불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못난이 아줌마는 늘 같은 자리에서 떡볶이를 팔았고, 모두가 그녀를 못난이 아줌마라고 불렀기 때문에 못난이 아줌마였다.
못난이 아줌마는 그 시절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아줌마들의 뽀글이 파마를 했고, 두툼한 입술에 떡볶이 색깔보다도 더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눈은 매우 작아서 웃으면 사라져 버리곤 했다. 요약하자면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의 피부톤을 조금 밝게 하고, 선글라스를 벗긴 뒤 그 자리에 작은 눈을 넣으면 못난이 아줌마가 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못난이 아줌마의 포장마차는 자취를 감췄다. 엄마에게 듣기로 못난이 아줌마는 떡볶이로 돈을 쓸어 담고 건물을 산 뒤 은퇴(?)했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번째 해에 내가 받아온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엄마는 새해가 밝자마자 나를 동네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학원에 보냈다. 개인적으로는 사교육을 받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와 아들의 성적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
학원에 가는 데 큰 반감은 없었던 것 같다. 엄마가 가라면 가는 거지 뭐-정도의 생각이었던 듯. 과목마다 교실을 옮겨 다니는 형태여서 어떤 강의실은 비좁았고 어떤 강의실은 또 지나치게 넓었다.
엉뚱한 소리나 농담을 즐겨하던 나는 비슷한 성향의 M군과 금세 친해졌는데, 우리는 학교도 다르고 학원에서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영혼의 단짝 같았다. 내가 쿵-하면 M군이 짝-을 했고 M군이 주거니-하면 내가 받거니-를 했다.
다행히 같은 강의실에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우리들의 농담을 좋아했다(우리를 엄청 싫어했던 여자애도 있었지만). 우리가 농담을 하면 강의실에 웃음꽃이 피었다. 수학 선생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만담 듀오 같아."라며 별명을 만들어주었다. 만담 듀오. 나는 그 별명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자부심마저 있었다.
나와 M군은 수업과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 항상 학원 앞 분식집에 가서 컵 떡볶이를 먹었다. 오래되어 가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500원이었던 것 같다. 그러한 물가의 시대였다(!).
컵떡볶이에는 튀김 하나를 넣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새우튀김이라고 불렀다. 생김새도 둥그렇게 허리가 굽은 새우 같았고 식감이나 맛도 새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새우를 넣어달라고 하면 아주머니는 떡의 양을 줄이고 그 튀김을 하나 넣어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새우가 아니었다. 아마도 명태살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던 듯한데, 아주머니는 한 번도 그 튀김의 명칭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가짜 새우튀김'을 먹을 때 우리는 아주 잠시나마 더 바랄 게 없는 중학생들이었다.
3월이 되어 개학을 하고 학원 반이 새로 개편되면서 M군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둘 다 휴대폰이 없었고, 나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물리적으로 멀어진 친구와는 계속 친하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아직도 M군의 얼굴과 그 분식집의 위치가 정확히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그 자리에 다른 게 들어섰지만. 언젠가 M군의 이름을 인스타그램에 검색해 본 적이 있다. M군의 이름은 흔한 편이 아니라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M군은 소년 티가 없어지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있었고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도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볼까 했지만 그저 두어 달 정도 가깝게 지냈던 중학교 시절 학원 친구가 15년이 훌쩍 지나 할 얘기가 뭐가 있을까 싶어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그 시절 먹던 가짜 새우튀김의 맛이 생각날 때가 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공무원에 도전하기 위해 휴학을 했다.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독서실에 다녔는데 독서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분식집이 하나 있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체격 좋은 형님이 하는 곳이었는데 떡볶이가 내 입맛에 딱 맞아서 매주 2번씩은 공부를 마치고 포장해서 집에 갔다. 엄마는 떡볶이가 몸에 좋지 않다며 적당히 먹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아들이 되기 위해 떡볶이를 포장하지 않고 가게에서 먹고 들어갔다.
앞서 체격 좋은 형님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체격이 좋다는 표현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보자마자 분명히 저 사람은 운동을 했거나 하고 있을 것이다란 생각이 드는 엄청난 크기의 몸이었다. 헬스장이나 태릉선수촌 같은 곳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앙증맞은 앞치마를 입고 떡볶이를 만들고 있었으니 나름 어디 가서 보기 힘든 진귀한 모습이었다.
내가 일주일에 두어 번씩 꼬박꼬박 가자 그 형님은 내게 한두 마디씩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근처 독서실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한다고 했다. 형님은 예상대로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종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 운동을 그만두고 떡볶이를 파냐고 묻자 형님은 다쳐서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뭐, 인생이란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몇 달 뒤 형님은 내게 가게를 접고 다른 동네로 간다고 했다. 거기 가서도 똑같이 떡볶이를 팔아볼 거라며. 어디인지 들어보니 엄청 먼 곳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왜 거기로 가느냐고 묻자 형님은 거기가 더 장사가 잘 될 것 같아서라고 했다. 그렇게 매주 두어 번씩 분식집 주인과 손님으로 짧게 만나던,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못한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별했다.
형님이 떠난 뒤 같은 자리에 또 분식집이 들어왔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보이는 얼굴을 한 아주머니였는데 떡볶이가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한 번 먹어보고 말았다. 누군가 강제로 떡볶이를 팔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한 아주머니가 만든 떡볶이는 즐겁게 먹기가 힘들었따. 그녀는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가게를 빼고 사라졌다.
그 형님은 지금도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귀여운 앞치마를 한 채 떡볶이를 만들고 있을까?
설탕을 무자비하게 때려 박은 듯 달달하던, 그래서 공부에 지친 내게 하루의 보상처럼 느껴지던 그의 떡볶이가 그립다.
떡볶이,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