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운전을 하며 음악 랜덤재생을 해놓았는데 태연의 '만약에'가 흘러나왔다. 나는 순식간에 대학교 신입생 때로 돌아갔다.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몇몇 장면들. 그때를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르게 살았을 것 같기도, 아닐 것 같기도 한 애매한 자신감.
내게는 반주가 시작되자마자 그 시절로 타임워프하게 해주는 노래들이 시기별로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분명히 있을 거라 확신한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음악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볼 것이고, 당신은 옆자리에 타야 한다. 거부권은 없다.
1. 서태지 - 난 알아요(추정)
아마 6~7살쯤이었을 것이다. 외삼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외갓집으로 가던 중, 차 안에서 서태지의 노래를 들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난 알아요'가 가장 유력하다. 나는 "이런 것도 노래라고?"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가사가 붙은 것만이 노래이자 음악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서태지는 너무 강렬했고 혁신적이었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시끄럽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혹시 서태지 팬이 계시다면 어린이의 시선이니 너그러이 봐주시기를.
그때를 떠올릴 때면 서태지의 노래를 들으며 빤히 바라보던, 차 창문을 열고 닫게 해주는 손잡이가 생각난다. 옛날엔 그 손잡이를 열심히 돌려야 자동차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있었다. 지금은 '딸깍'이면 된다.
외갓집까지 가는 데 24시간이 걸렸고,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외삼촌은 명절에 비행기만 탄다.
2. G.O.D - 어머님께
서태지 이야기 이후로 공백이 좀 있다. 초등 저학년을 다 건너뛰고 4학년 때 친구네 집에서 잡지를 읽었는데, 스타크래프트 관련 내용이 있어 아주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모 게이머가 쓴 스타크래프트 공략집이 있었는데 미네랄 양 끝과 커맨드센터 밑에 하나씩 벙커를 총 3개 지으면 절대 뚫을 수 없는 무적의 삼각벙커(...)라는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우리 동년배 남자들은 뭔 얘기하는지 알 거야... 알고말고
3. G.O.D - 거짓말
또 지오디다. 지오디는 이 노래로 음악 순위 프로그램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인 내가 들어도 '아, 이 노래는 참 좋다.'란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4. Westlife - My Love
초등 6년 때 왜 주최했는지 알 수 없는 장기자랑이 있었는데, 친구 2명과 함께 숟가락을 들고 이 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나올 때는 셋이서 뒤돌아 서있다가, 가사가 시작되는 순간 뒤돌아 숟가락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연출을 했었다. 이때 함께했던 두 친구의 이름과 얼굴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지만 은근히 판이 깔리길 바라는 음흉한 관종끼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5. UN - 선물
일요일에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 엄마의 감시를 피해 몰래 PC방에 가서 디아블로 2를 하던 기억이 나게 만드는 노래다. PC방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6. 에메랄드캐슬 - 발걸음
중학교 1학년 수련회 때 학교에서 좀 논다는 애들이 장기자랑에 나가서 부른 노래인데, 왜인지 모르게 그 무대를 바라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기억 속에서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모두 까맣게 보이고, 오직 무대만이 빛을 받고 있다.
7. 휘성 - With me
중 2년 PC방에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던 노래다. 어느 정도로 많이 들었냐면 정작 나는 이런 류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아 스스로 찾아 들은 적이 없는데도 노래 후반부의 랩과 애드립을 다 외웠다. 심지어 지금도 다 기억난다. 쓰다 보니 내가 학창 시절의 참 많은 시간을 PC방에서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8. 정인호 - 해요
중 3년 수련회 때 친구 A와 불렀던 노래. A는 위에 에메랄드캐슬의 발걸음을 부른 애들과 같은 패거리였는데, 개중에 하는 짓은 좀 덜 양아치스러운 애였다. 왜, 그런 애들 꼭 있지 않은가. 비행소년 패거리랑 어울리긴 하는데 다른 애들한테 나쁜 짓을 하지는 않는 애.
아무튼 A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좋아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중딩의 우정에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었겠냐 싶지마는 아무래도 노는 무리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덕분에(?) 다른 학교 여자애들이랑 노래방도 가보고 고음 잘 올린다고 칭찬도 받았다. 중고딩 세계에선 고음 잘 올리는 놈이 노래 잘하는 놈이다. 거기 모인 애들 중 나만 빼고 전부 다 담배를 피웠다.
A의 집에 놀러 갔을 때 A는 학교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제일 잘하는 내게 스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하지만 학습 의지만 있고 끈기가 부족했던 A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스타 배우기를 그만두고 내게 라면을 끓여주었는데, 자기는 원래 이렇게 먹는다며 케찹을(...) 넣어주었다. 나는 기겁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맛이 꽤 괜찮아서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던 기억이 난다.
A는 싸움을 잘했다. 어느 날 A는 누군가와 '맞짱'을 뜨게 되었는데 나는 따라가서 구경을 했다. 서로 탐색전을 하다 A의 발차기가 상대방의 귀를 강타했고 승부가 결정 났다. A는 상대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하면서 굉장히 미안해했다. 보통 싸우고 나면 승자가 패자에게 "깝치지 마라." 등의 말을 하지 않나? 싶은데 A는 그런 애였다.
이렇게 여러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우린 친했고 수련회 때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걸 떠올릴 때 이상하게도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관객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맞는데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9. Buzz - 겁쟁이
버즈는 바야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나 더하자면 SG워너비였다. 그 시절은 그랬다. 노래방을 가면 버즈 노래를 부르거나 SG워너비 노래를 부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반에 버즈 모창에 열을 올리는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중국 청나라 황제들 중 하나였던 그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버즈의 특징을 잡아 모사하는 데 열중했다. 특히 겁쟁이란 노래를 똑같이 부르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눈을 감은 채 한껏 과잉된 감정을 내뿜는 그의 모습은 나를 즐겁게 했다.
나 또한 수많은 버즈의 노래들을 불렀다. 겁쟁이는 물론이고 1st, 비망록, 일기, My love, 가시, Monologue, 어쩌면, 사랑은 가슴이 시킨다, 우리 이별 앞에 지지 말아요, My Darling,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많기도 하다. 진짜 많이 불렀구나. 세어보다 보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버즈의 노래를 들으면 교실 책상에 앉아 겁쟁이를 열창하던 그 녀석이 떠오른다.
10. 양파 - 사랑..그게 뭔데
시간이 흘러 나도 고3이란 것이 되었다.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라디오를 챙겨 듣던 시절이기도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겐 목숨과도 같은 아이리버 MP3(용량은 2G였던 것 같다)가 있었다.
'메이비의 볼륨을 높여요'를 내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나는 독서실에서 대학입시 공부를 했었는데 저녁 8시부터 2시간은 은밀하게 mp3로 '메볼높'을 들었다. 아직까지도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 N과 전날 밤 메볼높에서 들은 내용을 주제로 대화하는 것이 루틴이기도 했다(공부 얘기는 안 하는 거야?).
그 해에 양파는 무려 6년 만에 새 앨범으로 컴백을 했었는데 타이틀곡이 바로 '사랑..그게 뭔데'였다. 나는 그 노래를 메볼높에서 처음으로 듣고 단번에 빠져 꽤 오랜 시간 반복해서 들었다. 특히 후반부에 캐논변주곡이 깔리는 게 너무나 취향저격이었다. 그 앨범의 수록곡인 '그대를 알고'도 상당한 명곡이다. 그래서 특별히 가슴아픈 사랑을 해본 것도 아니면서 두 곡을 참 많이도 들었다.
글이 너무 길어질 듯하여 이쯤에서 끊고, 2편에서 성인이 되어 돌아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