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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롯 레터 Plot Letter Feb 08. 2022

20세기 초현실주의 대표주자,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반 고흐 같이~

▲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 출처 : 넷플릭스


이 가면의 주인공을 아시나요?


스페인 경제의 구심점이자 자본주의의 상징인 스페인 조폐국*, 바로 이곳에 괴상한 가면을 쓰고 빨간색 점프 슈트를 입은 무장 강도들이 침입해요. 그들은 ‘교수’라 불리는 한 천재의 지휘 아래 조 단위의 금액을 갈취하려는 배짱 좋은 강도 집단이었죠. 조직적인 범죄 집단이 조폐국을 장악하자 스페인 정부는 초비상 사태를 선포하고, 그 즉시 경찰과 군인들을 출동시켜 조폐국을 탈환하고 포로로 잡힌 민간인들을 구출하려 고군분투하는데!


이 이야기는 현재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 속 내용이에요. 여기서 무장 강도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콧수염이 길게 난 가면을 자주 쓰고 등장하는데요, 이 가면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 레터에서 소개해드릴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라고!


*조폐국: 동전 및 주화 제조, 귀금속 제품의 품질 증명 따위의 업무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


강도들이 달리의 가면을 쓴 건, 달리라는 예술가를 통해 저항과 자유의 의미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 시리즈 속 강도들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폐국을 점령하고, 경찰과 국라는 권력에 강하게 저항하죠. 그런데 이는 젊은 시절의 달리가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았고 초현실주의를 대변하는 예술가였다는 것과 연관이 있어요. 이 두 사상은 자본주의 체제와 정부, 전통적인 도덕 법칙과 종교 등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 의지만을 지지했거든요. 바로 이 지점에서 ‘종이의 집’ 시리즈 속 강도들과 달리가 공통점을 가지죠. 달리의 가면을 쓴 강도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자본주의의 상징인 조폐국을 점령하고, 기존의 권력인 경찰들에게 저항해 마치 무정부주의자와 같은 모습으로 비추어지거든요. 그래서 감독은 저항과 자유를 상징하는 그들에게 달리의 가면을 씌웠다고.


달리 가면에 그런 의미가 숨겨져 있었군요! 이야기를 들으니 달리가 왜 그런 사상에 영향을 받은 화가였는지, 또 어떻게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예술가가 된 것인지 궁금해요! 

▲ 살바도르 달리의 사진


기행을 일삼던 천재 소년


이러한 달리의 상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의 어린 시절부터 차근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달리는 1904년, 스페인 피게라스의 꽤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사실 살바도르 달리에게는 동명의 친형이 한 명 있었는데요, 달리의 형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지만 달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병에 걸려 죽고 말았죠. 이후 태어난 달리가 죽은 첫째의 환생이라고 믿었던 걸까요? 달리의 부모님은 둘째 아이에게도 첫째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죠.


달리 또한 그의 형처럼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청소년기에 이미 뛰어난 유화들과 자화상을 그려냈어요. 하지만 달리는 엄청난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하는데요, 같은 이름을 가진 형의 영정 사진을 매일 집에서 마주해야 했거든요. 늘 자기 자신을 증명해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언제든 자신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이는 달리의 성격과 정서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고.


여담으로 달리의 부모님은 죽은 첫째와 달리를 자주 비교하곤 했다는 말도 있더라구요..
▲ <라파엘 풍의 긴 목을 가진 자화상> 1920-21년, 살바도르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썩어가는 박쥐를 먹으려 하는가 하면, 벌레가 득실거리는 닭장 속에 한나절 동안 들어가 있기도 하고, 15살엔 파이프를 피워대며 어른 흉내를 내는 등 일반적인 또래 아이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기행을 일삼곤 했어요. 또, 안하무인하고 고집불통의 성격으로 자신이 더 옳다고 말하며 학칙들을 위반하고 부모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았죠. 이런 달리를 보며 달리의 아버지는 그가 다소 엄격한 스페인 공립 학교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그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프랑스어 학교에 보내기도 한다고. 그런가 하면 안 그래도 여러 사고를 치며 말썽을 부리던 달리에게 설상가상으로 더 큰 시련이 찾아오는데요, 바로 그가 17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 더욱 충격적인 것은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달리의 아버지와 이모가 재혼을 했다는 것이죠. 비록 달리는 자신의 이모를 존중하기에 이모를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으로 아버지와는 이후에도 잦은 마찰을 겪게 된다고. 


어린 시절 겪은 사건들의 영향일까요? 달리는 평생 동안 여러 기행을 일삼으며 당최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해요. 이런 달리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를 접한 건 언제인가요?

▲ 청년 시절의 달리와 그의 여동생


대학 시절, 다다이즘을 만나다


달리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접한 건 대학시절 그리고 그 이후인데요, 우선 달리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다사다난한 청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꾸준히 그림에 관해서는 엄청난 재능과 열정을 보였던 달리. 그는 이런 천재성을 인정받아 마드리드에 위치한 세계적인 예술 학교,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돼요. 하지만 대학 시절에도 달리의 유별난 성격은 여전했기에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키죠. 어느 날 달리의 대학교수는 수업 시간에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 오라는 과제를 내줘요. 이에 평소 자기 자신을 천재 화가로 자부하던 달리는 성모 마리아 상 대신 저울을 그려 가죠. 달리의 과제를 보고 기가 막혔던 교수는 어째서 저울을 그려 왔냐 물었지만, 달리는 “선생님께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냥 성모 조각상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울을 보았습니다” 라고 대답한다고.


달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대학시절 다다이즘에도 영향을 받았는데요, 다다이즘은 기존의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한 저항 운동이었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전통적인 이념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이성적인 결과를 낳았고, 바로 여기서 발생한 사회적 저항 운동이 다다이즘이라고. 달리 또한 이러한 다다이즘에 영향을 받아 대학 시절 반정부 시위까지 참여하고 이 과정에서 잠시 감옥에 투옥되어 정학 처분까지 받는 등, 위태로운 대학 생활을 이어가요. 그러던 중, 결정적으로 ‘심사위원보다 내가 더 완벽하게 답안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제출할 수 없다’ 라는 이유로 미술사 과목의 답안 제출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퇴학까지 당하게 되죠. 하지만 훗날 달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학교 체제 속 작품 평가에 염증을 느꼈고, 교수들이 자신의 그림을 평가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퇴를 결심했다 이야기했다고.


정말이지 달리는... 엄청나게 뛰어난 재능을 갖기도 했지만 더불어 오만하고 사회 부적응자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군요. 그나저나 대학교에서 퇴학 당한 이후 달리는 어떻게 되나요?

▲ <욕망의 수수께끼 ;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1929년, 살바도르 달리


예술가들의 도시, 파리로 가다


달리는 대학에서 퇴학을 당한 1926년, 예술가들의 도시인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떠나는데요, 바로 그곳에서 미술계의 거장들을 만나며 그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해요. 우선, 달리는 평소 존경하던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그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이후 몇 년 동안은 그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화풍과 큐비즘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해요. 그리고 그 시절, 달리는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이자 무의식에 대한 이론들을 정립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팬임을 자처하기도 하죠. 그는 무의식과 억눌려 있는 인간의 본능을 대변하는 을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정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고.


*큐비즘: 20세기 초 피카소의 주도 하에 국제적으로 퍼진 미술 운동. 원근법을 무시한 채 사물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특징을 가짐.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자 정신분석의 창시자.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현대 심층 심리학의 개척자임.


결정적으로, 달리는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 시초로 알려진 앙드레 브르통이라는 시인을 만나 초현실주의 예술가 집단에 가입하게 돼요.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 이후 발생한 사회적 운동이자 미술사적 사조로, 기존의 질서와 예술의 존재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데 그치는 다다이즘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선하고 예술로 삶의 열정을 표현하는 사상이에요. 이러한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도 영향을 받는데요,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며 에 대해 생생히 묘사하는 것이 주된 화풍이죠. 달리는 이러한 초현실주의에 큰 영감을 받아, <기억의 지속>, <욕망의 수수께끼 : 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등의 작품을 탄생시키며 자신만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정립했고, 이들은 1930년대와 40년대를 걸쳐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발돋움하게 한다고.


 <기억의 지속>은 교과서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정말 정말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에는 어떤 특징이 있나요?

▲ <기억의 지속> 1931년, 살바도르 달리


현실적인 듯 비현실적인


달리는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문맥에 놓아 충돌과 부조화를 유도해요. 가령, <기억의 지속>과 같은 작품은 인식 가능한 사물인 시계가 마치 치즈처럼 녹아 흐물거리는 모습으로 표현돼 비상식적인 문맥에 놓여 있으며, <주변을 날아다니는 한 마리 꿀벌에 의해 야기된 꿈>에서는 호랑이가 물고기의 입속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행태를 하고 있죠.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작화 방식을 ‘편집증적 비평방식’이라고 부른다고. 용어 자체의 뜻은 꽤나 복잡하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추상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구체화해 정교한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작업을 뜻해요. 마치 자기 자신을 환각 상태에 놓은 듯, 의식을 극한의 위기 상태로 몰고 감으로써 나타나는 인간 내면의 정신 분열을 하나의 서정적인 이미지로 포착하는 것이죠. 이러한 초현실주의를 대변하는 달리의 작품들은 마치 꿈속의 세계를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고. 


이렇게 달리는 초현실주의적인 작품들로 지금까지 기억되긴 하지만, 사실 그는 1930년대에 브르통이 이끌던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제명되기도 했어요. 그 이유는 바로 자본주의나 독재자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마르크스주의 신념을 거부하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참여할 수 없게 되죠. 이에 달리는 자기 자신이 초현실주의 그 자체이기에 아무도 자신을 내쫓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화풍*을 따라가며 종교적인 색채의 그림들이 주를 이룬다고. 이렇게 초현실주의와는 다소 멀어진 그의 후기 작품들은 예술계에서 그 평이 많이 갈리기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1941년 뉴욕 근대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며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이후 뉴욕에서 영화, 연극, 패션,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며 막대한 부를 쌓기도 하죠.


*고전주의 화풍: 조화, 균정, 명석함을 추구하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사조로, 르네상스 시대에 꽃피웠으며, 17세기 이후 유럽 전역에 파급되었음.


시계가 흘러내리는 데에는 바로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군요! 달리만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돋보여요. 이런 달리에게도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었다고 하던데, 그게 누구인가요?

▲ 달리와 갈라의 사진


달리의 영원한 뮤즈, 갈라


달리는 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요, 그녀의 이름은 바로 갈라!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갈라가 10살 연상의 여인이었으며, 심지어 달리와는 불륜 관계에서 시작했다는 거예요. 1929년, 한 파티에 초대된 달리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이었던 폴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를 만나게 돼요. 달리는 갈라를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고, 남편이 있는 그녀에게 접근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죠. 갈라는 이런 달리의 모습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고, 결국 둘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는 도중 함께 도망쳐 잠적해 버려요. 그리고 몇 년 후, 갈라는 전 남편과 이혼 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하게 된다고.


갈라에 대한 달리의 사랑은 맹목적이었어요. 달리는 평소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유 모를 공포감을 갖고 있었는데요, 갈라를 통해 이러한 불안감을 덜었죠. 또, 자신이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옆에서 돌봐주는 그녀에게 정서적으로도 크게 의존했다고. 실제로 갈라는 달리의 매니저로서 그의 작품 전시와 일정 조정에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는 작품 판매와 전시 장소 계약에도 관여했다고 해요. 이렇듯 달리의 인생에 큰 지분을 차지한 그녀는 실제로 이후 그의 작품 곳곳에 드러나며, 달리는 그녀만을 위한 발레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고!


비록 불륜에서 시작한 관계이지만, 달리에게 갈라는 인생의 반쪽이자 뮤즈, 또 사업 동반자이기도 했군요~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불리면서도, 기괴한 행동과 과도한 집착으로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일삼았던 달리! 오늘부터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을 볼 때마다 느낌이 새로울 것 같아요~ 

플롯 TMI                                              

다재다능한 예술가, 달리


달리는 미술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과 영화 연출부터 상업 디자인, 공간/가구 디자인, 주얼리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그가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던 예술가였어요. 특히 산업 디자이너로서 ‘츄파춥스’의 로고를 디자인 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달리의 친한 친구였던 츄파춥스의 사장 베르나트는 1969년의 어느 날, 달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던 도중 그에게 로고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아요. 그런 그의 고민을 들은 달리는 곧장 냅킨 위에 츄파춥스 로고를 스케치해 주었죠. 이 때 달리가 그려준 스케치는 지금까지도 츄파춥스의 대표 로고로 사용되며, 달리가 살아생전 열었던 전시회들에서는 츄파춥스를 덩달아 판매하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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