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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롯 레터 Plot Letter Feb 08. 2022

1980년대 미국의 모습,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돈 가방을 들고 도망치는 르웰린 모스, 출처 : 네이버 영화

세 남자의 숨막히는 추격전


1980년대 미국, 텍사스의 어느 황량한 벌판. 카우보이 복장을 한 채 돌무더기 위에서 저격총으로 사냥 중인 한 남자가 있어요. 그의 이름은 르웰린 모스. 과거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력이 있는 르웰린은 현재 텍사스에서 아내와 함께 카라반에서 살고 있죠. 드넓은 텍사스 광야에서 무리 지어 풀을 뜯던 영양 한 마리에게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 르웰린. 회심의 한 발이었건만, 아쉽게도 그는 결국 사냥감을 놓치고 말아요. 놓친 사냥감에 대해 안타까워하던 중, 그는 우연히 시체로 가득한 피의 현장을 발견하는데요, 그곳은 놀랍게도 멕시코 마약범들과 폭력배들이 총격전을 벌인 현장이었죠. 유혈이 낭자한 현장을 유심히 살펴보던 르웰린은 끔찍한 총격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 한 명과 돈 가방을 발견하게 돼요. 숨을 헐떡이던 생존자는 르웰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르웰린은 매정하게도 그런 그를 뒤로하고 돈다발이 두둑한 가방만 챙겨 집으로 돌아간다는데.


▲ 경찰을 살해하는 안톤 쉬거, 출처 : 네이버 영화

한편, 텍사스의 한 경찰서에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가 검거돼 앉아 있어요. 그리고 그를 체포한 한 보안관은 상부에 범인을 잡았으며, 모든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보고하죠. 그런데 그가 보고를 완료하던 그 순간! 안톤 쉬거는 조용히 보안관 뒤로 접근해 그의 손목에 묶여있던 수갑으로 보안관의 목을 졸라 살해해버려요. 그렇게 경찰서에서 빠져나와 대범하게 경찰차를 타고 텍사스 도로를 주행하던 안톤 쉬거는, 앞차의 노인 운전자를 도로 갓길로 세운 뒤 아무렇지 않게 공기총으로 살해하기까지 하는데! 


마구잡이로 보이는 사람을 모두 죽이는 건가요? 끔찍해요! 그럼 르웰린의 상황은 어떤가요?


야심한 밤, 돈 가방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르웰린.그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잠에 드려는 순간까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생존자의 모습에 크게 갈등하게 돼요. 그래서 결국 밤중에 다시 사건 현장을 찾게 되죠. 하지만 생존자는 이미 사망한 였고, 설상가상으로 돈 가방을 회수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멕시코 마약상들과 안톤 쉬거에게 꼬리를 잡혀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아요. 영화 속 끈질기게 르웰린을 쫓는 안톤 쉬거는 사실 마약 조직 보스에게 돈을 회수하라 의뢰받은 청부 살인업자였거든요. 이런 사건 현장을 가장 늦게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정년 퇴임을 앞둔 텍사스의 오랜 보안관 에드 톰 벨. 그는 경험 많고 지혜로운 보안관이지만 르웰린과 쉬거가 쫓고 쫓기는 동안 계속해서 한발 늦게 사건 현장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돈 가방으로 인해 세 남자가 서로를 쫓는 이야기군요! 이렇게만 들었을 땐 그냥 평범한 추격 스릴러 같은데, 왜 그렇게 이 영화가 특별하다는 건가요?

▲ 기름 가게의 노주인과 대화하는 안톤 쉬거, 출처 : 네이버 영화

사이코패스와 늙은 보안관 


그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 인해 엄청난 몰입감을 불러일으켜서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요목조목 뜯어보면 상당히 많은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영화의 중점이 되는 세 인물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죠.


우선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는 잘 훈련된 살인마이자 별다른 동기 없이 사람을 죽이는 악 그 자체로 묘사돼요. 그에게는 어떠한 원칙과 이유, 논리도 통하지 않으며 그저 살인을 위한 살인을 저지를 뿐이죠. 사실 그가 르웰린 모스를 쫓아가 살해하려는 이유도 돈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성가시게 했기 때문이거든요. 


이러한 그의 성향은, '동전 뒤집기'라는 게임 장면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나요. 이 게임은 기름 가게에 우연히 방문한 안톤 쉬거에게 나이 많은 주인이 어디로 가는 길이냐며 일상적인 대화를 건네며 시작되죠. 가게의 노주인이 건넨 말은 지극히 평범한 몇 마디였지만, 안톤 쉬거는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무표정하게 되받아치며 눈빛으로부터 목을 죄는 긴장감을 조성해요. 잔뜩 긴장한 가게의 노주인은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안톤 쉬거는 개의치 않고 자신과 동전 뒤집기 내기를 하자고 강요하죠. 노주인은 자신이 내기에 건 것이 없다며 거절하려 하지만, 쉬거는 이에 “아니, 당신은 이미 내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걸었소. 그저 당신이 모르고 있었을 뿐” 이라고 되받아쳐요. 이처럼, 안톤 쉬거는 ‘무질서함’과 ‘예측 불가능함’‘우연’을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평범하게 살아가던 기름 가게 노주인도 안톤 쉬거라는 ‘우연’을 만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목숨을 잃을 했죠. 영화는 안톤 쉬거 통해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삶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고.


▲ 나이 많은 보안관 에드 톰 벨,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런 안톤 쉬거와 반대되는 인물이자 또 다른 중심인물은 바로 나이 많은 보안관 에드 톰 벨, 그리고 르웰린 모스에요. 우선 톰은 정의롭고 도덕적인 인물이지만, 텍사스의 모든 치안이 완벽히 통제되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하기만 하죠.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가 다시 질서 정연하고 이상적으로 통제되길 원하는 인물이에요. 이런 톰은 과거의 정의와 지혜에만 머물러 있기에 ‘우연’과 ‘무질서함’을 대변하는 안톤 쉬거의 뒤를 쫓기만 급급할 뿐, 단 한 번도 그를 만나거나 검거하지 못하죠. 그는 비록 경찰로서 오랜 시간 경험을 쌓아왔지만, 변화하는 사회 속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해지는 범죄 행태와 만연하는 폭력에 한탄만 늘어갈 뿐이라고.


아~ 결국 크게 보면 청부 살인업자 안톤 쉬거 VS 르웰린 모스, 에드 톰 벨의 대립 구도로 볼 수 있는 거군령? 그럼 르웰린 모스는요? 그는 안톤 쉬거와 어떤 관계인가요?




▲ 1960-197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

혼돈의 미국 사회 속 세 남자


현대의 무질서한 사회를 상징하는 안톤쉬거와 대비되는 르웰린 모스, 그리고 에드 톰 벨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1980년대 미국의 시대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당시의 미국은 혼돈 그 자체였는데요, 이러한 사회적 혼란의 중심에는 베트남 전쟁이 있었죠. 이 영화에서는 '베트남전'이 심심치 않게 언급되며 르웰린 모스 또한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설정됐는데, 실제 미국은 당시 베트남전에서 패배해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었거든요. 미국 내부에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설상가상으로 전 세계적인 오일 쇼크*가 발생하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도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었죠.또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전에 없던 수많은 연쇄 살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범죄율이 치솟는 등, 80년대의 미국 사회는 통제 불가능한 무질서의 끝을 달리고 있었어요.그리고 이런 혼란들은, 당시 최대 강대국으로서 전 세계를 통제하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죠.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과거를 그리워하던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영화 속 인물이 바로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 그리고 르웰린 모스에요. 영화 인트로의 에드 톰 벨의 독백에서도 톰은 과거 텍사스 사회의 안전한 치안과 영광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현재 일어나는 수많은 악랄한 범죄 사건에 지친 듯한 어투로 말을 이어나가거든요.


*베트남 전쟁: 베트남의 통일 과정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이 사회주의 성향의 북 베트남과 치룬 전쟁. (1964~1975)


*오일 쇼크: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가격과 생산량을 조절해 야기된 세계 각국의 경제적인 혼란. 

그리고 돈 가방으로 인해 쫓기는 르웰린 모스는 또다른 측면에서도 또한 과거 미국의 영광을 대변하는 인물로 볼 수 있어요. 그는 시종일관 텍사스의 카우보이 복장을 고수하는데요, 텍사스의 카우보이들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주도하며 미국이 아메리카 전 대륙을 지배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역사적 상징 그 자체거든요. 그들은 아메리카 토착민들, 그리고 멕시코인들과 싸우며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큰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죠. 영화 도입부가 순차적으로 에드 톰 벨이 현 세태에 대해 탄식하는 독백, 르웰린 모스의 사냥 실패, 그리고 안톤 쉬거의 등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미국의 영광스러운 과거와 질서는 무너지고, 혼란만 가득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단순한 추격 스릴러 영화인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치밀하게 설계된 영화였군요! 그럼 영화의 제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노인'을 대변하는 인물 에드 톰 벨, 출처 : 네이버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는 이유 


영화의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의미를 이미 눈치채셨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영화의 제목 속 ‘노인’은 ‘신체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바로 ‘과거 영광에만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고 있어요. 이러한 영화의 주제의식은 통제와 예측이 불가능한 사회의 상징인 안톤 쉬거가, 극 중에서 많은 노인들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죠. 안톤에게 살해당한 텍사스의 노인들은 대부분 텍사스와 미국의 과거 영광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즉, 영화는 인생의 불확실성과 사회의 무질서함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며 더 이상 과거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동시에, 부조리로 가득한 사회,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현실을 적막한 분위기로 그려내죠.


우연과 무질서함을 대변하는 안톤 쉬거 조차 영화의 마지막에는 우연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 영화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관람해 보세요! 그나저나, 영화의 내용은 정말 훌륭한 것 같은데, 연출도 칭찬받을 만한 건가요?

▲ 80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바르뎀, 출처: Alt Film Guide

제 80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주역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연출 면에서도 굉장히 뛰어나다고 평가돼요.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바로 코엔 형제들이거든요. 코엔 형제들은 과거에도 <시리어스 맨>, <파고>,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의 굵직한 작품들을 연출하며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훌륭한 감독으로 인정받아 왔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노인을 위하는 나라는 없다>는 많은 평론가들에 의해 그들이 연출한 작품들 중 최고로 인정받기도 한다고!


이 영화는 텍사스 서부의 황량함, 그리고 무질서한 사회의 막막함을 대변하듯, 정적이고 고요한 장면들로 가득해요. 여타 다른 서스펜스 영화들이 여러 배경 음악들을 활용해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액션 신과 안톤 쉬거의 살인 장면에서조차 특별한 배경 음악을 사용하지 않아요. 화면은 오로지 카메라의 구도와 피사체의 움직임,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들을 조용히 담아낼 뿐이죠. 이러한 연출은 명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안톤 쉬거), 조슈 브롤린(르웰린 모스), 그리고 토미 리 존스(에드 톰 벨)의 감탄할 만한 연기력을 만나 그 빛을 발하죠. 이러한 감독의 연출과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은 안톤 쉬거와 기름 가게 노인의 동전 내기 장면, 그리고 어둠 속 르웰린 모스와 안톤 쉬거의 총격전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이렇듯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연출연기작품의 주제의식이 삼 박자를 이루어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과 각생상을 수상했어요. 또한 촬영상, 편집상, 그리고 음향상에의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죠. 2007년에 개봉했지만, 지금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회자되는 것만 봐도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고!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2018년 국내에서 재개봉 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예요. 다가오는 주말을 맞이해, 시대의 명작을 감상해 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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