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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롯 레터 Plot Letter Feb 08. 2022

연극의 기원, 디오니소스

술과 연극은 원래 하나?!

▲ <세멜레> (Semele), 봉 불로뉴


제우스가 찜한 여인, 세멜레


디오니소스 신화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의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돼요. 올림포스의 최고신이자, 희대의 바람둥이 제우스는 여느 때와 같이 인간 세상을 살펴보며 어여쁜 여인이 없는지 찾고 있었어요. 그때, 그리스 중부에 위치한 국가 테바이*의 공주인 세멜레를 발견하게 되죠. 아름다운 세멜레의 미모를 본 제우스는 금방 사랑에 빠져버려요. 그리곤 결혼생활의 수호신이자 질투의 여신인 아내 헤라를 두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해 세멜레에게 접근하죠. 그렇게 세멜레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한 제우스는 세멜레를 임신시키기에 이르렀고, 아이를 가진 세멜레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냈어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이자, 뱃속 아이의 아버지인 사내가 바로 올림포스의 최고신 제우스라니! 행복에 눈이 먼 세멜레는 제우스와 매일 밤 밀회를 즐긴다고.


*테바이: 그리스 보이오티아 지방의 수도로, 테베로도 불림. 세멜레와 제우스 이야기, 안티오페와 그 쌍둥이 아들, 오이디푸스의 전설, 아이스킬로스의 전설 등 신화에 자주 등장함.


최고신과의 은밀한 데이트라니! 그런데 질투의 여신이자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요?

▲ <세멜레의 죽음>, 루카 페라리


세멜레, 한 줌의 재가 되다?!


맞아요. 명색이 올림포스 최고 바람둥이 신인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죠. 세멜레와 제우스의 밀회를 알게 된 헤라는 곧바로 질투심에 활활 타올라 남편의 사랑을 빼앗아 가버린 세멜레에게 벌을 내리기로 마음먹어요. 그러곤 어린 시절 세멜레를 돌봐 주었던 유모 베로에로 변신해 그녀에게 접근하죠. 변신한 헤라는 세멜레에게 의심하는 마음을 불어넣어요. 순진하게도 헤라를 자신의 유모라고 생각한 세멜레는 제우스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헤라에게 털어놔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은 부글부글 끌어 오르지만, 헤라는 세멜레를 걱정하는 척하며 뱃속 아이의 아빠가 정말 제우스인지, 아니면 제우스임을 사칭하는 사기꾼인지 어떻게 아냐고 말하죠. 이런 헤라의 언변은 세멜레를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했어요. 그녀는 사실 제우스가 신의 모습을 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한 번 생겨버린 의심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법! 결국 세멜레는 고민 끝에 제우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으니, 자신을 사랑한다면 꼭 들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이자, 심지어 자신의 아이까지 잉태한 여인의 요청을 거절할 리 없는 제우스는 그녀의 어떤 요청이든 들어줄 것을 호기롭게 스틱스 강*에 맹세한다고.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제우스는 이내 절망하게 돼요. 세멜레의 부탁은 바로 신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과 광채를 관장하고 번개를 사용하는 신인 그의 모습은 인간의 눈과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불행히도 이미 스틱스 강에 세멜레의 요청을 들어주겠다 맹세했던 터라, 아무리 제우스라도 약속을 무를 순 없었어요. 결국 찬란한 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제우스를 본 세멜레는 그의 광채로 인해 그 자리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린다고!


*스틱스 강: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저승을 둘러싸고 흐르는 강. 이 강에 대고 한 맹세는 신과 인간 모두 어길 수 없다고 함.


앗! ‘의심’으로 인해 비극에 이르는 이야기 흐름이 이전에 다루었던 프시케 이야기와도 비슷한데요? (프시케 레터가 궁금하다면 클릭)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의심과 호기심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그나저나, 세멜라 뱃속의 아이는 어떻게 된건가요?

▲ <바쿠스(디오니소스)> 1858, 안토노비치 브루니


넓적다리에서 태어난 아이


자신의 눈앞에서 세멜레가 죽는 것을 본 제우스는 자신의 아이만은 구해내겠단 일념으로 6개월가량 된 뱃속의 아이를 재빨리 꺼내 자신의 넓적다리를 갈라 안에 넣고 꿰어버리죠. 그렇게 그 아이는 남은 기간을 제우스의 허벅지 안에서 보내게 돼요. 그리고 마침내, 제우스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오늘 레터의 주인공인 디오니소스! 그는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탄생한 수많은 자식들 중, 유일하게 제우스의 몸에서 태어난 신이기도 하다고.


자식이 세상으로 나온 기쁨도 잠시, 제우스는 곧 전령의 신 헤르메스에게 디오니소스를 헤라가 보지 못하는 곳에 몰래 데려가 키우라고 명령해요. 아내의 질투와 분노가 자식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웠던 것이죠. 이에 헤르메스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염소로 변장시키고 그를 인도의 니시산으로 데리고 가, 니시산의 님프*들과 그의 이모인 이노에게 맡겨요. 님프들의 보호로 헤라의 눈을 피해 장성한 디오니소스. 그는 우연히 포도의 재배법과 과즙을 짜내는 법을 발견하고, 포도주를 만들어 술의 신이 되죠. 이렇게 디오니소스는 어린 시절을 무사히 보내는데요, 안타깝게도 결국 헤라에게 존재가 발각되고 말아요. 그가 세멜레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것을 알아본 헤라는 디오니소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세계 각지를 떠돌게 만들죠. 이 때문에 이집트부터 시리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역을 떠돌아다니게 된 디오니소스는 각지에 포도재배법을 보급하고, 술을 담그는 법을 알려주는 등 문명을 전달했어요. 그렇게 헤라의 저주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던 디오니소스는 프리기아* 지역에서 우연히 자비로운 대지의 여신 레아를 만나 광기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다고!


*님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요정들의 총칭. 

*프리기아: 오늘날의 터키 영토에 속한 반도의 왕국. 


오오, 결국 저주에서 풀려나게 됐군요! 탄생부터 우여곡절이 참 많은 신인 것 같은데,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어떤 신인가요?

▲ <안드로스 섬의 주신 축제>, 티치아노


행복과 황홀감, 일탈을 관장하는 신


디오니소스는 정말 특별한 신이에요. 인간의 피가 섞인 반인반신 중 유일하게 신들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올림포스 12신 안에 들었거든요. 올림포스 12신으로 추앙받는다는 건, 디오니소스가 완전한 신으로 여겨진다는 의미기도 하죠. 디오니소스가 12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먼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의 출생이었어요. 디오니소스는 로마 신화에선 바쿠스, 바카스, 바커스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어머니가 둘인 자라는 뜻이에요. 그를 잉태한 것은 인간 세멜레이지만, 출산한 건 제우스이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디오니소스는 반인반신보다는 완전한 신으로 인정받았고, 이러한 이유가 신으로서의 그의 입지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디오니소스가 올림푸스 12신에 등극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에게 수많은 열렬한 추종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디오니소스 신앙은 트라키아* 지방에서 자연 신앙으로 시작해 그리스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가 대지의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자 술의 신이기도 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숭배하는 의식에서 술을 먹고 문란한 잔치를 벌였다고 해요. 여성들은 담쟁이덩굴을 감은 지팡이를 흔들며 난무하거나, 야수를 때려죽이는 등 광란적인 의식을 치렀고, 이러한 일탈을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했죠. 디오니소스를 숭배한다는 명목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실컷 날릴 수 있었으니, 그가 왜 그렇게 인기가 많았는지 짐작이 가시죠?


*트라키아:  발칸 반도 동부 일원에 걸쳐 있는 땅. 트라케라고도 함. 트라키아인들은  호전적이며, 문신/화장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함.


인간의 욕구와 본능을 다루는 신이어서 그렇게 인기가 많았군요! 그런데 디오니소스가 도대체 어떻게 연극과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  디오니소스 극장


연극의 기원이 된 축제, 디오니시아제


디오니소스 신앙이 그리스로 흘러 들어오던 때, 그와 관련된 문란하고 광기 어린 의식도 같이 유입되면서 그리스인들에게 전파되었어요. 당시 귀족들로부터 억압받던 평민들 사이에서 디오니소스 신앙은 빠르게 퍼졌고, 그를 숭배하는 의식 또한 더욱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했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그리스 문명은 디오니소스 신앙을 국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신앙의 범주 안으로 편입시켰다고 해요. 그의 신전을 ‘이성’으로 대표되는 아폴론 신전 옆에 모시고, 몇 년에 한 번씩 축제를 벌이는 형태로 받아들인 것이죠. 축제의 내용 또한 술에 취해 맹목적으로 광기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 정상적인 노동으로 복귀하기 위한 잠깐의 일탈로 여겨지게 되었어요. 이렇게 순화된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 디오니시아제에서 바로 오늘날의 연극 예술이 출현했다고! (하지만 이런 디오니시아제는, 그리스 시대를 거쳐 로마로 들어와선 다시 한번 그 문란한 성격이 매우 심해져 국가에서 금지하기도 했다고 해요!) 

▲  바쿠스 신전

그를 경배하기 위해 아테네에서 거행되던 디오니시아제는 연극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에요. 이 축제는 꽃 피는 3월경에 시작해 7~8일간 지속되었다고 하죠. 국가의 지원하에 정식 배우들을 투입하여 축제 기간 동안 합창대회와 연극 경연대회를 열곤 했는데요, 희극과 비극 공연으로 이루어진 이 연극 경연대회가 오늘날 연극제의 원형이 되었죠. 그리고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자주 불렸던 외설스러운 노래, 코모스는 훗날 '연극'을 뜻하는 코메디(comedie)로 발전했어요. 또한 디오니소스에게 양을 제물로 바치며 불렀던 노래 트라고스(tragos)는 ‘비극’을 뜻하는 트라제디(tragedie)의 어원이에요. 


이렇듯 디오니소스는 연극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신이라 실제로 비극과 희극의 신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술’을 매개로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이끌어 내며, 일탈 속에서 창조를 발현시키는 디오니시아제는 아테네에서 그야말로 문화와 를 상징하는 축제였다고! 


실제로 트라키아 지방에서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가 거행될 때, 여인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고 해요. 가면을 쓰는 행위를 통해 원래의 본인을 가리고 새로운 역할을 꾸며 연기해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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