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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윙크의사 Jan 02. 2023

고령화 사회에 던지는 질문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버려둔 존엄

80대 할머니 환자가 의식저하로 실려와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오래전 발생한 뇌졸중으로 누워만 지내시는 분인데, 추가로 폐동맥 색전증과 또 다른 다발성 뇌경색이 발견되었고, 최근 식사를 잘 못 드셨는지 탈수가 심해 전해질, 신장기능이 망가져 있었다. 수액 및 영양공급, 심장기능 평가, 항응고 치료가 필요하겠다고, 시간이 좀 필요할 거라고 보호자들에게 길게 설명드렸었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보호자들이 또다시 면담 신청을 해왔다.


속으로 투덜 대며 가보니, 딸, 아들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는 80대 후반의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보호자가 눈에 띄었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본인이 십여 년간 환자를 먹고 입히고 재웠다며, “퇴원하고도 본인이 집에서 돌봐도 되겠지요?”라고 나를 간절한 눈으로 쳐다봤다. 옆에서 딸들이 고개를 흔들며 나에게 눈치를 줬다. “아무래도 요양병원에 가셔야겠지요? 아버지 혼자 돌보기 힘드셔요”라고 하면서. 아마 어제 댁에 돌아가서는 간병 문제로 가족들끼리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이 짠한 게, 갑자기 영화 [아무르]가 생각이 났다.


2012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아무르]


행복하고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한 음악가 부부의 삶은, 어느 날 아침 갑작스레 아내 안느가 기억상실과 마비 증세를 보이며 막다른 기로에 놓이게 된다. 급성 뇌졸중으로 인해 반신 불수가 된 아내 안느는 자신을 다시는 입원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남편 조르주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끌고도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그의 희생과 헌신은 ‘아무르(Amour), 사랑’이라는 이유로 가능했지만, 급격히 악화되는 병든 아내를 곁에서 돌보는 것은 그를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분명한 한계에 다다르게 했다. 스스로 배변조차 가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안느는 ‘더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병세가 진행하여 대화조차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남편 조르주는 사랑하는 아내 삶의 존엄한 끝, 혹은 그 자신 삶의 존엄한 지속을 위해 스스로 그녀의 목을 조른다.


세상에 발을 디딘 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리게 될 삶과 죽음. 존엄한 삶을 살기도 어렵지만 존엄하게 죽기란 더욱 어려운 게 현대 사회인 듯하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과연 현대 사회에서 존엄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오늘날 내과 전공의들의 주치의 업무 중 가장 지치는 일은, 응급실로 몰려드는 환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중환자실 콜도 아니다. 지병으로 오랜 시간 와상 상태로 지내며, 거동은 커녕 식사도 대소변도 누군가 챙겨주고 돌봐주어야 할, 그래서 가정과 사회의 짐이 돼버린 노인들, 그들을 어떻게 다시 가정으로, 또 사회로 다시 돌려보낼 수 있을 까에 대한 문제다.


병원에서 실컷 치료해서 가정으로 돌려보낸다 하더라도, 어김없이 한 달 아니 일주일 만에 똑같은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온다. 문제는 돌봄과 관리다. 자식이나 가족이 있다 한들 생활비를 벌고 병원비를 대느라 바쁘게 삶을 이어가다 보니, 끼니나 위생을 챙기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관리를 해 줄 사람이 없다. 100이면 100, 똑같이, 아니 이전보다 더 중증인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오기 마련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그래도 위의 사례처럼 애정을 가지고 모셔가는 가족들이 있으면 다행이다. 어떤 경우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보호자가 퇴원을 계속 미룬다. 본인 몸이 아프다, 데려갈 사람이 없다, 환자가 다 좋아진 게 맞느냐, 이유도 가지가지다. 생판 남인 나 조차도 이렇게 정성으로 돌보는데, 정작 피가 섞인 가족들이 환자를 모른 척한다. 환자는 집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쓰는데, 자식들은 집에 데려가기 싫다고 악을 쓴다. 그럴 때면 평정심이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환멸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입장 바꿔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오죽하면 저렇게 됐을까.


그런 경우에는 방법은 하나다. 원무팀이나 전원협력팀에 SOS 의뢰를 하는 것이다. 나보다 협박, 회유, 소통에 훨씬 능한 분들이 결국 보호자를 설득해 환자가 퇴원하게 되는 곳은 요양병원이다. 늙고 병든 환자는 죽기 전에 익숙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남아 있는 집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본인의 의사와 달리 또 다른 낯선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게 어련히 삶의 마지막 이겠거니 한다. 그리고 내 삶의 마지막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슬프다.


2020년 겨울 즈음, [셜록]에 보도된 20세 청년의 간병살인이 화두였다.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이러한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병든 자들의 무기력한 죽음과 간병의 덫에 걸려 또 다른 꽃다운 청춘이 무너지는 슬픈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인간다운 존엄한 죽음이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2021년 겨울, 병원 당직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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