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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Jan 08. 2020

지저분한 것을 그냥 두는 재능을 가졌습니다

어째서 난 아이 등원 후의 시간을 집안일로 채우지 않고 있을까?

 최근 퇴사를 하고 다시 전업 엄마가 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무래도 난, 회사를 다니는 게 더 잘 맞는 것 같아."


 그녀는 아이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의 시간을 집안일만 하면서 낭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출근해서 일을 하면 월급이라도 받지. 커피 한 잔 마시려고 하면 거실에 널브러진 아이 옷가지들이 눈에 밟혀. 옷 걷고, 아이 방 장난감도 치우고, 빨래하고, 청소기 돌리고, 설거지하고, 저녁에 먹을 반찬 몇 개 만들어 놓으면 어느덧 하원 시간인 거야. 그럼 애 데리러 가야 하고, 애 데리고 오면 놀아줘야 하고. 하루 종일 쉴 틈이 있어야지."


 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진심으로 깊은 공감은 하지 못했다. 나의 경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의 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시간으로 보내고 있었고, 그 시간은 내게 긍정적인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의 엄마들도 종종 말하곤 했다. 집안일하고 요리하다 보면 하원 시간이 가까워진다고. 엄마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사치인 것 같다고.


 집에 와서 곰곰 생각해봤다. 왜 난 아이 등원 후 시간을 집안일로 채우지 않고 있을까? 어째서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걸까? 아이가 하원 후의 우리 집은 그 어떤 집보다 난장판인데. 거실에는 아이가 침대에서 가져온 인형들이 널브러져 있고, 아이 방은 사방에 블록이 깔려 있고, 빨래통에는 아이 빨래, 어른 빨래가 한가득 채워져 있는데. 어디 그뿐인가. 싱크대에는 어젯밤 야식 먹은 그릇과 아침 준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지 않고,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그것들을 유유히 지나쳐 책상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실  있는 걸까?

 

 하정우는 자신의 저서 <걷는 사람>에서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허심탄회하게 밝힌 바 있다. 요는 이렇다.


 누군가 하정우에게 조심스럽게 성인 ADHD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가 너무 산만하다는 게 이유였다. 하정우는 그의 제안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산만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어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곰곰 생각해본 그는 검사는 받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대신 그는 생각을 다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산만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다양한 관심을 두는 '능력'이 있다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재능'을 가진 것이라고. 그의 남다른 능력과 재능 덕분에 하정우는 배우의 삶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화가, 작가 등 영역을 넓혀가며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저분한 것을 그냥 두는 능력



 그의 말을 인용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에게는 지저분한 것을 그냥 내버려 두는 능력이 있다고. 치우지 않고 참아내는 재능이 있다고.


 그런 능력과 재능 덕분에 난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을 통해 나조차 몰랐던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내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해주는 일들에 도전하게 되었으며,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되었다. 나를 더 친절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에도 의도적으로 집안일은 그대로 둔 채 노트북 앞에 앉았다. 따뜻한 둥굴레차를 마시고, 아메리카노를 또 한잔 마시면서 이 글을 쓴다. 오늘의 글이 또 하나 완성되었구나, 행복감을 느끼면서. 지저분한 것을 잘 견디는 나의 능력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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