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 엘리 Apr 09. 2019

아이에게 설탕을 내어주십시오

놀이에도 가성비가 있다면 설탕은 가성비 갑입니다

먹다 남은 고수나 샐러리를 추가하면 좋아요!



생각 없이 틀어놓은 TV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집중하던 바느질을 멈췄습니다. 어느 요리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태국 요리였던가, 어떤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면서 분명 '먹다 남은 고수나 샐러리'를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계란이나 김치가 아니라.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출처 : unsplash)



살면서 우리 집 냉장고에 샐러리나 고수가 있던 적이 있었던가? 바느질하던 손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영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요리 고수는 마치 냉장고 한 구석 어딘가에 늘 자리 잡고 있는 평범한 식재료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대부분의 냉장고에 '남은 고수'는 없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구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 요리의 제대로 된 맛을 내기 위해서는 고수나 샐러리가 꼭 필요하다' 정도로 언급했다면 멈칫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너네 집엔 이거 없니?



아이들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장난감 언니가 나와서 날마다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놉니다. 때때로 손만 나오기도 하니 언니인지 오빠인지 아저씨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뽀로로, 핑크퐁, 타요버스, 콩순이, 또봇, 시크릿 쥬쥬 등 다양한 캐릭터들로 무장한 장난감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놀이 영상들은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재밌게 가지고 놀았던 내 장난감이 시시해집니다. 크면 클수록 늘 우리 집에 없는 '저거'가 갖고 싶어 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생후 6개월 이후 요거트, 소면, 불린 미역 등 촉감놀이를 즐겨온 채유



아이들에게는 뭐든 다 장난감이 된다



특히 어릴수록요. 딸아이가 앉을 수 있게 된 6개월부터 틈나는 대로 두부, 요거트, 쌀 튀밥, 미역 등 다양한 재료로 촉감놀이를 해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27개월이 된 지금까지도 딸아이는 손으로 만지고 몸에 바르는 오감놀이, 촉감놀이를 참 좋아합니다. 모래, 계란 껍데기, 물감 등 먹지 못하거나 까끌거리는 촉감에도 거부감을 보이지 않습니다. 젓가락질도 곧잘 하는 요즘, 밥 먹을 때 손으로 만지고 바른다는 것이 부작용이지만요.


어린이집 다녀온 후 저녁밥을 먹는 시간까지 붕 뜨는 시간에 꼭 한 가지씩 놀이를 합니다. 딸이 요즘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단연 '놀이터에서 뛰어놀기' 지만, 공기가 허락하지 않는 날엔 집에서 놀 수 있게 간단히 '장난감'을 준비해놓습니다. 아이는 완성된 형태의 장난감이 많이 없는 편입니다.


쉽게 구할 수 있고 사지 않아도 되는 '남은 장난감'을 선호합니다. 페트병, 계란 껍데기, 계란판, 신문지, 전단지, 택배박스, 휴지심 등 아이랑 놀 장난감들이 집안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소금, 밀가루, 파스타면, 검은콩 등 식재료도 인기 만점 장난감입니다. 파프리카, 양상추, 방울토마토 등 알록달록 채소들도 시각, 촉감, 청각, 미각을 일깨워주는 재밌는 장난감입니다. 다양한 채소랑 익숙해진 덕분에 가리는 것 없이 골고루 다 잘 먹게 된 것은 의외의 베네핏입니다.



설탕 놀이에 열중하는 25개월의 채유



이날은 모래놀이를 좋아하는 딸을 위해 모래 대신 '설탕'을 준비했습니다. 며칠 전, 딸아이가 모래에 물을 부어 다 녹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꿩 대신 닭으로 색깔도 비슷한 갈색 설탕을 쓰기로 합니다. 놀이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설탕을 쏟아부은 후, 모래 놀이할 때 쓰던 삽, 모형들이랑 체 같은 주방 도구들도 옆에 두었습니다.  


드디어 하원 시간. 아이는 집에 도착해서 펼쳐져 있는 설탕 놀이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옷도 안 벗고 달려듭니다. 설탕을 삽으로 퍼서 여기저기 옮겨 닮고 숟가락으로 얼음판에다가 하나씩 퍼 나르더니 '꿀꺽'. 설탕 한 숟갈을 퍼먹습니다. "맛이 어때? 달달하지?" 하고 물으니 배시시 웃으며 퉤하고 뱉어버립니다. 인생 최대 단맛일 텐데 너무 달아서 이상했나 봅니다. 모래는 먹을 수 없지만, 설탕은 맛볼 수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먹으면 안 돼!" 하는 잔소리를 덜하게 되어 아이도, 엄마도 즐겁게 놀 수 있습니다.




설탕 그림 놀이에 푹 빠져있다



설탕을 체에 걸러서 눈도 만들고 트럭과 배 모양 장난감에 설탕도 채워서 여행도 떠났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아이가 지루해질 때쯤 엄마가 준비한 비장의 아이템, 스케치북과 풀을 내놓았습니다. 설탕 그림 그리기를 하려고요. 스케치북을 펼쳐 풀로 그림을 그리고 설탕을 뿌린 후 스케치북을 흔들흔들하고 털어내면 설탕 그림이 짜잔, 하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채유가 요청한 사자가족, 비행기 그림




우와~! 또또!! 내가 내가!



이 간단한 놀이에 딸아이가 열광합니다. 아이의 함성에 엄마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아이는 호랑이, 상어 가족, 엄마 사자, 아빠 사자, 아기 사자, 비행기, 하트 등등 다양한 그림들을 그려달라고 요청하고 또 요청합니다. 엄마는 없는 솜씨를 발휘해서 그리고 또 그립니다. "내가 내가" 딸아이는 적극적으로 설탕을 덮고, 스케치북을 흔들흔들 흔듭니다. 어찌나 집중하는지요. 설탕이 떨어지고 그림이 모습을 드러내자 잇몸 만개하며 너무나 신나 합니다.

                                    

보통 놀이를 하면 30분을 못 넘기는데, 설탕 놀이는 1시간 동안이나 몰입해서 했습니다. 특히, 설탕 그림놀이만도 30분 넘게 했습니다. 잠들기 전에도 "설탕으로 흔들흔들" 하고 싶다고 하면서 스케치북을 잡고 팔이랑 몸 전체를 흔드는데 어찌나 사랑스러운지요.


그래, 다음에 또 하자!



아이가 이렇게 기뻐하면 준비한 엄마도 너무나 신이 납니다. 크게 준비한 것도 없는데 열심히 신나게 놀아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아이가 클수록 집중력도 좋아지고 다른 놀이로 확장도 가능하니 더욱더 놀이가 재밌어집니다. 아이의 함박웃음은 '내일은 또 무얼 하고 놀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이런 궁리를 하게 만듭니다.


놀이에도 가성비가 있다면, 설탕은 단연 가성비에 가심비까지 뛰어난 놀잇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널 위해 준비했어, 신문지 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