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의 내가 30대의 나에게 전하는 실패와 두려움
2084년 6월은 십수 년 전의 8월만큼이나 무덥다. 후끈한 밤공기가 온몸을 감싸는 통에 침대에 가만히 누워 뜬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다.
'내가 백 살이라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다는 듯 새삼스레 나이를 되뇌어본다.
나는 올해로 백 살이 되었다. 백세까지 살아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말이다.
때마침 거실 벽에 걸려있는 뻐꾸기시계가 울린다. 벌써 자정인가 보다. 뻐국, 뻐국, 뻐국... 컴컴한 방에 누워 뻐꾸기 소리에 가만 귀 기울이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방금 뻐꾸기가 열세 번 울린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시계도 나만큼이나 오래된 탓에 셈 능력이 떨어진 게다.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살짝 열린 방 문 틈으로 스며든 밝은 달빛이 어쩐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방 문을 열자, 놀랍게도 눈 앞에 초록빛 회양목 화단으로 빙 둘러싸인 놀이터가 나타났다.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있고 알록달록 색깔의 시소, 미끄럼틀, 그네 등의 놀이시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 위로 완연한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아장아장 걷는 돌쟁이부터 우당탕 요란하게 미끄럼틀을 타는 유치원생들, 금방이라도 하늘 위로 날아갈 듯 맹렬하게 그네를 타는 초등학생까지 놀이터에는 저마다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로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점점 더 또렷해진다.
"엄마! 더 세게 밀어줘, 더 세게!"
네 살 남짓의 어린아이가 그네가 하늘로 향할 때마다 꺅꺅 환호성을 터뜨리며 세게 밀어달라고 성화다. 젊은 아이 엄마는 두 팔에 체중을 실어가며 있는 힘껏 아이의 엉덩이를 밀어준다. 어딘가 낯익은 장면인데,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첫 아이를 낳고 키우던 30대 때의 내 모습이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쳤다.
'혹시.. 저 엄마가... 젊었을 때의 나?'
때마침 아카시아 꽃향기를 실은 봄바람이 코끝에 전해진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맞아. 내게 저런 시절이 있었지!'
심장이 이렇게 터질 듯이 뛰는 것이 얼마만인가. 나는 망부석이 된 듯, 4살 난 첫째 딸과 젊음으로 빛나는 30대의 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불현듯 지난 세월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순간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 순간이 바로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으니 말이다.
아이를 직접 키우며 아이가 커가는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을 그만뒀다. 육아는 대체로 행복했지만, 이따금씩 내 안에 들려오는 두려움과 불안의 목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사회에 나가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내 경력은 이미 쓸모 없어진 건 아닐까?'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늦지 않았을까?'
젊었을 때 미래는 늘 불안했고, 현실을 직시하기는 두려웠다.
해보지도 않은 채,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못한다고 스스로 못 박았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생각의 한계를 긋고 또 그었다. 지레 포기하고 회피하는 편이 노력했다가 실패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조금이라도 틀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라치면 여기저기서 온갖 핑계를 끌어와 자기 합리화를 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점점 더 좁고 낮은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에 걸림돌은 언제나 있었다. 실패의 이유를 찾으려면 단 몇 분만에 수만 가지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익숙하지 않은 것,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할 때는 실패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도전하고 행동하지 않는 게 어쩌면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백 번의 실패를 딛고 성공을 이루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으로 치부하면서 말이다.
역시, 나는 안돼..
학창 시절, 나는 이 말을 밥먹듯이 내뱉었다. 딱히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선생이나 부모의 말버릇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너는 안돼!"라고 하지 않았지만 제대로 노력 한번 해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어버렸다. 이런 혼잣말을 매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어린 시절의 나는 얼마나 많은 성장할 기회와 경험을 놓쳐왔던 것일까.
엄마로 살면서 깨달았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엄마인 나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스스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내 마음과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아이에게 하는 긍정적인 말을 나에게 건네기 시작한 것이. 문득문득 내면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휩싸일 때면 나는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난 이미 좋은 엄마야.'
'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야.'
'내가 보유한 경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난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어.'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야.'
놀이터를 내리쬐는 햇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두 볼이 발그레해진 아이가 물을 찾는다. 30대의 내가 시원한 물 한 병을 꺼내 아이에게 건넨다. 고개를 하늘로 젖힌 아이의 목을 타고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에게 티슈 한 장을 건넸다. 아이가 얼떨결에 휴지를 받아 들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어린 딸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30대의 젊은 내가 나를 쳐다보며 고마운 눈짓을 보낸다.
젊은 나를 대면하는 이 꿈같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나는 젊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생각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이루게 될 거예요. 미래가 보름달같이 훤한데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걱정하면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아요."
"네?"
젊은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올해로 100세예요. 젊은 시절, 나 자신을 믿지 못하고 괜한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시도 한번 하지 못하고 놓친 기회들이 후회돼서 한 마디 전하고 싶었어요. 나에게 실패할 기회를 많이 줬어야 했는데... 그게 참 아쉽네요. 모든 실패 경험은 변화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거예요. 그러니 지금부터 열심히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부지런히 실패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쏟아내자 기운이 빠져나갔는지 그만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순간, 어린 딸아이와 젊은 내가 놀라서 나에게 달려온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걱정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은 희미해져 간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눈을 떠보니 내 방 천장이 보인다.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었던 모양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에 새벽 어스름이 스며들고 있다.
그때 거실 밖에서 뻐꾸기시계가 울려 퍼진다.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뻐국. 새벽 다섯 시를 알린다. 기상 시간이다. 매일 해온 아침 요가를 하러 몸을 일으켰다.
감사하게도 새로운 하루를 맞는구나. 나는 오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나는 오늘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