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삼겹살, 곰국, 오징어 젓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딱 고등학생 때까지 였던 것 같다. 우리 가족 모두가 식탁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던 것이.
저녁밥을 차리는 것은 전부 엄마의 몫이었다. 장녀인 나도, 나와 4살 터울진 남동생도,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던 아빠도, 아무도 엄마가 밥을 차리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 저녁 메뉴 선정부터 수저 한쌍, 물 한 컵까지도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엄마의 '밥 먹어라'라는 부름에, 그것도 최소 세 번은 부르다 엄마가 '밥 먹으라고!!! 몇 번을 말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 그제야 우리는 어기적거리며 방을 빠져나와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식탁 앞에 정갈하게 놓인 따끈따끈한 밥과 국을 아무 말 없이 먹었다. 우리 집 식탁에서 대화가 빠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IMF가 터지고 난 직후, 엄마는 돈을 벌러 나가야 한다고 했다. 급작스럽게 가장이 된 엄마는 그 후로도 우리 식구의 저녁밥만은 부지런히 차려주셨다. 엄마가 일을 하고 돌아와서도 나머지 식구들은 여전히, 아무도 엄마의 밥 차리기를 도와주지 않았다. 우리 세 식구는 모두 삼식이가 되어 엄마가 차려준 밥과 국, 반찬들을 말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허물을 벗은 매미처럼 식탁에서 몸만 쏙 빠져나와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남은 음식을 치우고 설거지하는 것도 언제나 엄마의 몫이 되었다.
우리에게 항상 따뜻한 밥과 국을 대접하던 엄마는 매번 가장 늦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에 밥과 국은 한 김 식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한 술 뜨기도 전에 '간은 맞니?' '맛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며 겸연쩍게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맛있는데?' '간도 딱 좋아'라고 대답하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었다. 그제야 엄마는 안심하고 식사를 하셨다.
정말 맛있다는 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모든 걸 혼자 준비한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 하는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음식 솜씨가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나의 엄마가 해준 밥은 한창 클 나이였던 그 당시 나에게는 언제나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엄마는 상견례 자리에서 저녁밥 차리기를 포함해 그 어떤 집안일도 도와주지 않았던 무심한 첫째 딸을 '반찬투정 한 번을 안 한' 착한 딸이라고 소개했다. 의외의 대답을 들은 난 엄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명에 비친 엄마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 기억 속 '집밥'은 곧 모든 밥을 담당했던 '엄마'이고, '엄마'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삼겹살, 곰국 (우리 집에선 뼈국이라 불렀다.) 그리고 오징어 젓갈'이다.
쭉 나열하고 보니 음식 솜씨가 딱히 필요 없는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는 자신은 요리를 잘 못한다, 고 평생 입버릇처럼 말하셨는데 이는 결코 겸손이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엄마는 틈만 나면 삼겹살을 구워주셨다. 삼겹살에 참기름장이면 그 어떤 반찬도 필요 없으니 엄마로서는 값싸고 양 많은 삼겹살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기 파인 나와 동생이 먹기는 또 오죽 잘 먹었겠는가. 도시락을 싸던 시절, 반찬으로 삼겹살을 싸주실 정도로 엄마의 삼겹살 사랑은 대단했다. 식은 삼겹살이 비리고 맛없을 것이라는 편견은 버리시라. 참기름과 소금이 버무려진 삼겹살은 친구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인기 반찬이자, 초등시절 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다음으로 우리 집 식탁에 많이 오른 음식은 곰국과 오징어 젓갈이다.
엄마는 곰국을 '뼈국'으로 불렀다. (다 클 때까지 나는 '뼈국'이 맞는 표현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 뼈국을 나와 내 동생은 정말 잘 먹었다. 특히, 나는 사골 국물을 음료수 마시듯이 마셨는데, 아침을 거르던 내가 뼈국을 끓인 다음 날엔 어김없이 국물에 밥을 말아 아침까지 챙겨 먹고 등교를 했다.
그게 기뻤던 엄마는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골 뼈를 사다가 여러 번 핏물을 빼고 드럼통만 한 냄비에 뼈를 넣고 뽀얗게 우러날 때까지 끓이고 또 끓이셨다. 철없는 나는 엄마가 내 다리보다 굵은 뼈를 고아 끓여내기 시작하면 마냥 기쁘고 들떠서 들통 같은 냄비 앞을 서성였다. 푹푹 찌는 한 여름, 불 앞에서 곰국을 끓이는 엄마의 고충은 알지도 못한 채.
오징어 젓갈은 요리 솜씨 없는 엄마에게 구원투수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반찬가게가 흔치 않던 시절에도 손쉽게 살 수 있었던 '사 먹는 반찬'인 데다 한 번 사면 두고두고 오래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엄마에게 오징어 젓갈은 가성비라는 단어가 없던 30년 전부터 '가성비 뛰어난 밥도둑'이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오징어 젓갈을 담은 하얀 종지가 있었다. 사온 오징어 젓갈에 엄마는 마늘과 고추를 썰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려 비벼주었다. 그 위에 눈송이 같은 깨소금도 흩뿌렸다. 그렇게 엄마표로 둔갑한 오징어 젓갈은 하얀 종지에 담겼다. 그 종지는 끼니때마다 냉장고에서 나와 우리 집 식탁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엄청난 염도를 자랑하는 오징어 젓갈은 새끼손톱만큼만 먹어도 밥 한술을 꿀떡 넘길 수 있었다. 한창 외모에 민감한 시기라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밥을 멀리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도 오징어 젓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밥을 두 그릇씩 해치울 때가 많았다. 자식 밥 먹이는 것이 중대 임무라고 여긴 엄마에게 오징어 젓갈은 '믿고 사는 밥도둑'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왜 우리에게 밥을 못 먹여서 안달이 났을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와 동생의 밥만은 손수 챙긴 우리 엄마를 보며 든 의문이었다. 요리 솜씨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엄마는 늘 우리에게 사 먹는 밥이 아닌, '집밥'을 먹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셨다. 식당에 가는 것은 연례행사였고, 배달음식도 엄마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밥을 해줄 수 없을 때만 먹을 수 있었다.
삼겹살과 곰국, 그리고 오징어 젓갈은 그런 우리 엄마가 자식들에게 '집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찾은 최소한의 엄마표 음식이 아니었을까. 특별한 솜씨가 없어도 자식들에게 맛있는 한 끼를 차려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엄마의 바람대로 우리는 엄마가 해준 집밥을 먹고 잘 자랐다. 대학생이 된 후에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가 새벽이 다 돼서야 겨우 집에 들어왔다. 엄마가 해 준 저녁밥은 못 먹는 날이 훨씬 더 많아졌다. 내 동생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 이후 우리는 집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졌고 엄마는 차츰 주방일에서 해방되었다.
환갑이 넘은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집에서 밥을 하지 않으신다. 나는 결혼을 했고, 남동생은 직장에 다닌다. 우리 가족은 명절이나 누구 생일이나 돼야 함께 모여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이 마저도 엄마표 집밥인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젠가 엄마는 음식을 안 하게 되니 더 못하게 되었다고 하시며 씁쓸하게 웃으셨다. 그런 엄마를 따라 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많던 삼겹살과 곰국, 오징어 젓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엄마가 구워주고 끓여주고 비벼준 엄마표 음식들을 언제 또 먹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오는 걸까.
엄마의 겸손한 음식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은 요리 못하는 엄마가 되고 나니, 어린 시절 부지런히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무언가를 손수 해주셨던, 음식 솜씨 없었던 엄마의 집밥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행복 그리고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