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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Jun 06. 2019

미안합니다, 한 우물만 못 파요

가만있지 못하는 재능을 가진 자가 전하는 묵직한 삶의 메시지

걷기를 예찬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인생을 담은 책이었다. <걷는 사람, 하정우> 말이다. 그는 자신을 배우,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리고, 걷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두 발을 뻗어 세상 속으로 쿵, 쿵 내딛음으로써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 같았던 시절부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현재까지 꾸준히 자신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걷기'를 선택했다.


살면서 얼마나 걸어봤던가. 걸으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닫는다. 그러니까, 걷는다는 것은 어디까지 가기 위한 목적의 수단 중 하나였지, 오로지 '걷기'를 위해 걸은 적은 없었다. 반면, 그는 생각이 복잡할 때도, 침대 속에 누워만 있고 싶을 때도,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을 때도, 눈이 오건 비가 내리건 하루에 한 번은 운동화를 신고 3만 보 이상을 걷는 것이었다.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배우들과 함께 국토대장정을 걸으며 찍은 <577 프로젝트>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 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26p)


말 한마디에 577 킬로미터 국토대장정을 걸은 하정우는 대장정을 마치면 드디어 해냈다! 는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이상하게도 그저 무기력하고 허무함만 느껴 당황스러웠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길 위에서 쌓은 추억과 순간들이 뚜렷하게 떠올랐고 그가 그 길 위에서 자주 웃었고 걷는 매 순간이 좋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다고. 인생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오늘 하루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즐기며 산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인생은 없노라고. 



가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그는 영화감독 하정우는 감독 하정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는 말을 했는데 이제 막 시작한 초보 감독으로서 유명 배우의 유명세를 등에 엎고 과분한 관심을 받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부담도 될 것이다. 현재 감독 하정우는 배우 하정우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차피 길게 갈 일이니 우직하게 그 길을 걸어보겠노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나는 아직 감독의 삶이라는 긴 도정의 초입에 서있다. 중간 지점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넘어지거나 꽃다발을 받거나 하는 일들은 어쩌면 크게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 일희일비 전전긍긍하며 휘둘리기보다는 우직하게 걸어서 끝내 내가 닿고자 하는 지점에 가는 것. 그것이 내겐 중요하다. (231p)


우리는 실제 해보지도 않고 머릿속으로 저울질을 할 때가 많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물레이션을 돌려보다 그 생각에 지쳐 시작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또 꼭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내게 된다.


아직은 돈이 충분치 않잖아, 돈을 더 모은 다음에...

시간이 없긴 해,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있어야 말이지...

이 나이에 괜히 모르는 분야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거 아니야?

애만 없었어도... 결혼만 안 했어도... 이직부터 하고 나서... 살 좀 빼고... 더위만 지나면...


스타트업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레버리지>, <머니>를 쓴 롭 무어도 동일 제목의 신작을 냈다.



Start Now, Get Perfect Later.



먼저 시작하고 보완하면서 나중에 완벽해져라! 우리는 완벽하게 시작하고자 부단히도 애를 쓴다. 그러다 빈틈이 보이면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어 포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왜? 포기를 해버리면 실패를 겪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 모두는 실패를 맞딱들이는 것을 두려워하니까. 생각을 포기해버리면 적어도 실패한 사람은 되지 않으니 그 편을 택하는 것이 쉬운 것이다. 이를 반복하면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고,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된다.


하정우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한 발을 내딛어보라고. 그럼 저절로 가게 되어있다고.

계획한 게 있다면, 하고 싶은 게 생각났다면, 일단 뭐라도 시작해보라고. 그러다 보면 그 길을 가는 것 밖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어차피 길게 갈 일, 과정에서 일희일비하지 말고 끝까지 한번 가보자고. 말이다.



고마워요. 저도 한 우물만 못 파요.


누군가 하정우에게 조심스럽게 성인 ADHD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가 너무 산만하다는 게 이유였다. 하정우는 그의 제안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산만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어서 부정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곰곰 생각해본 그는 검사는 받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대신 그는 생각을 다르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여기저기 다양한 관심을 두는 '능력'이 있다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재능'을 가진 것이라고. 그 능력과 재능 덕분에 하정우는 배우의 삶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화가, 작가 등 영역을 넓혀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하나만 우직하게 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라면서 왜 많은 분야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일을 경험해보려고 하면 일단 잘되긴 글렀다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우물만 파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몇 개의 우물을 부지런히 파서 열심히 두레박을 내리다보면, 내가 평생 식수로 삼을 우물을 발견하기가 더 쉬워지지 않을까? 나는 한 사람 안에 잠재된 여러 가지 능력을 일생에 걸쳐 끄집어내고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자 의무라고 본다. 그런 과정이 결국 나를 완성해주는 것이라 믿는다. (217p)


나 역시 호기심이 많은 편에 속한다는 것을 근 몇 년 전에 깨닫게 되었다. 그림도 그려보고, 꽃꽂이도 배워보고, 아이 옷도 만들어보고, 책도 써봤다가 블로그도 해봤다가 인스타그램, 유튜브, 브런치도 한 번씩 다 시작했었다. 운동도 수영도 했고 요가도 했고 필라테스도 했었다. 이 중 더 이상 안 하는 것이 꽤 많다.


하지만 그중에 독서, 글쓰기 (브런치 포함), 유튜브, 신문 읽기, 영어공부, 수영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하고 있다. 나에게 잘 맞고 길게 갈 것들을 찾은 것이다.


여러 가지 것들을 한 번씩 다 시작해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한 우물을 파야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을 바늘처럼 콕콕 찔렀다. 남편도 '넌 참 취미도 많다.'라고 하며 말미에 '끈기 없이 금방 관두는 게 문제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다. 두루두루 관심이 많은 사람,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재능, 이라고 여겨주면 좋았을 것을.


그래도 나는 개의치 않았다. 원래 남들이 뭐라고 하는 말은 한 귀로 잘 흘려버리는 편이라서 남편의 생각도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취해서 그것에 집중했다. 그러자 내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고 인생의 목표도 더욱 뚜렷해졌다.


그리고 <걷는 사람, 하정우>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한 사람 안에 잠재된 여러 가지 능력을 일생에 걸쳐 끄집어내고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자 의무라는 그의 말이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의 불안감을 덜어준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앞으로 인생을, 걷기처럼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내 보폭에 맞춰, 내 숨으로 우직하게 걸어 나가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책은 걷기 백서라기보다는 인생 철학서에 가까운 것이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닌가.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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