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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민케이 Apr 08. 2016

16. 바쁜 건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핵심을 지키지 못해 위기를 겪었던 레고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가고 책임이 커질수록 일이 많아진다.

'아니, 고생해서 승진했으면 좀 편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전혀 아니다.

관여해야 하는 일의 종류는 많아지고, 메일함에 안 읽은 메일은 쌓여만 가고 책임을 져야 할 일은 많아진다. 매니저가 일은 다 시키고 겉으로 노는 듯이 보여도 온갖 압박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을 확률이 크다.

아,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다. 팀원들에게 모두 일을 시키고 자신은 띵가띵가 노는 매니저도 당연히 있을 터. ( 예외적인 이 경우가 대다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 )

우리 직장인의 로망은 한가하면서 돈 많이 받는 거지만 그런 건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다.


몇 년 전에 같이 책임을 지던 사람들이 갑자기 회사를 떠났다. 어쩌다 보니 그 책임을 나 혼자 떠맡게 되어버렸다. 단지 책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의 일들을 3-4가지 매니지 해야 하는 상황.

긴 회사 생활 중에서 최악으로 바빴던 시기였다. 회의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하루 4-5개의 회의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그 와중에 시간을 미룰 수 없는 이메일은 처리해야 하고. 점심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보스와 콘퍼런스 콜을 해야 하니 김밥으로 때운다.


가장 최악은 두 개의 컨퍼런스콜이 동시에 겹쳤던 때였다. 둘 다 빠질 수 없는 콜. 고민 끝에 회의실의 유선전화로는 한 콜을, 핸드폰으로는 다른 콜을 들어갔다. 두 전화기의 소리를 무음 시켜놓았다. 한 콜에서 내가 말해야 하거나 질문이 들어오면 그쪽 전화로 얘기하고 또 다른 콜에서 얘기할 차례가 되면 다른 전화기로 얘기하고. 동시에 말할 차례가 되지만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적응할 수 있다.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과 "제대로 일"하는 것은 다르다.  나도 많은 업무를 쳐냈지만 충분히 생각하고 제대로 일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매우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 나는 이렇게 바쁘게 일하고 있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니.'

만나는 사람들은 "너무 바쁘시죠. :(" 라며 걱정스레 말을 건넸고, 나는 짐짓 "회사생활이 다 그렇죠 뭐"라며 의뭉을 떨었다.


그러나 아태지역의 한 보스의 한 마디에 이 뿌듯함은 바로 산산이 부서졌다.

전 세계를 돌며 정말 산전수전 경험을 겪은 나이 많은 독일계 보스. 그러면서도 항상 새로운 시각과 전략을 선보이는 걸로 명성을 떨치는 분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걸어 나의 커리어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시민케이, 네가 여러 가지 일을 다양하게 하고 바빴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야. 네가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일이 생기겠지. 그 소홀히 한 하나의 일을 사람들은 기억할 거야."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고, 대꾸할 말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에이 설마 그래도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바빴던 거 알아줄 거야.' 일말의 기대감은 남아 있었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업무는 정상화되었고, 나는 원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점심도 못 먹어가면서 바쁜 업무를 이어갔던 것을.

대신 그들은 정확히 기억했다. 내가 많은 시간을 들이고 "처리" 하느라 소홀히 했던 일들을.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레고. 덴마크의 이 매력적인 회사도 위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전통적인 장난감에서 벗어나 TV와 비디오 게임으로 달려가던 시절, 레고는 혁신을 꾀했다.

흔히들 혁신의 7가지 진리라 불리는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람을 고용하라

- 블루오션 시장으로 향하라

- 고객중심으로 운영하라

- 파괴적 혁신을 실행하라

- 대중의 지혜를 활용하고 열린 혁신을 촉진하라

- 혁신의 전 영역을 탐험하라

- 혁신 문화를 구축하라

(어떤 혁신 책을 봐도 나오는 꽤 익숙한 내용들이다.)


문제는 레고가 이 혁신들을 추진하면서 레고의 핵심에서 벗어났다는 거였다..

레고의 핵심은 원통형 돌기의 직사각형 블록과 그 블록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거였는데 레고는 이를 버렸다. 무분별하게 제품들을 내놓았다. 유아들을 위한 듀플로를 익스플로어라는 제품군으로 대체했고, 기존 블록보다 큰 블록과 피규어들을 양산했다.  (사진들을 보라)

시장은 냉담했고 레고는 파산 위기까지 몰렸었다.


레고는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려는 혁신을 재차 시도했다. 듀플로를 다시 되살렸고 호환성 없는 블록들은 버렸고 기존 레고 세트를 전통을 지키면서 재해석했다.  레고는 결국 성공했고 그 결과는 지금의 레고다.

현재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인구의 80배가 넘는 블록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한다.


(출처 : 도서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 - 데이비드 로버트슨, 빌 브린 공저)



사람이든 회사든 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 일이다. 열심히"만" 일할 때 문제가 생긴다. 바쁘기만 하고 제대로 된 일을 하지 못할 때 모두가 내가 제대로 못한 일만 기억한다. 바빴음을 칭송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농업적 근면성"이 회사원의 최고 덕목이라 여기는 상사를 만난다면? 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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