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후반에 실패한 첫사랑은 찬란해야만 하는 내 20대 연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랑하지만 마음껏 사랑해 주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은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큰 미련으로 남았고, 이는 20대에 만난 사람들을 첫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해 버리는 아주 큰 실수를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수능 시험을 본 뒤에 해 보고 싶었던 '회색 머리'. 회색머리를 하기 위해 두피가 타는 듯한 고통을 수반한 두 번의 탈색을 감행하고 은회색 빛으로 염색했다. 얼마 가지 않아 회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색이 빠져 머리카락은 초록색으로 변하더니 다시 일주일 정도 지나 탈색한 상태로 남았다.
어깨 길이 정도의 덥수룩한 노랑머리의 신입생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부터 가장 눈에 띄었다. 화장도 안 하고 한껏 예쁘고 꾸미고 다니는 또래 여자 신입생들과 달리 털털하고 머슴아 같았던 나는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했고 거의 매일 술자리가 이어졌다. 그중 한 선배가 취중 고백을 하였고, 사귀게 된다.
복학생 선배와 눈에 띄던 신입생과의 연애는 몇 명 안 되는 과에 소문이 났고, 어딜 가나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 주목받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애인'이란 타이틀이 몹시 낯설고 불편했던 나는 결국 연애를 시작하고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그 관계에서 도망치고 만다.
첫 번째 공개 연애로 피를 본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연애를 한다면 '다시는 공개연애는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떠있던 그때 학교 운동장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던 그때 두 번째 연애 상대와 '파바박' 불꽃이 튀었고 비밀연애로 이어졌다. 다행히 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방학이 되자 나는 집으로 잠시 내려갔다. 그 짧은 순간에 그분은 대구에 있던 나를 만나러 왔고, 우리 집 앞까지 오게 된다. 치킨 집을 하고 있던 엄마와 아빠가 만난 유일한 애인이었다.
그렇게 대구까지 보고 싶어 달려왔으나,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이 관계에서도 도망치게 되었다. 학기가 시작되고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이 사람과 연애하는 티를 내지 않고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서 비밀 연애 때문에 자주 얼굴을 봐야 했던 우리는 어색한 티도 못 내고 대면 대면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 학생회 활동을 하던 나는 늘 학생회실에 있었고, 졸업을 한 선배는 회사 퇴근 후에 심심하면 학교에 놀러 왔다. 그렇게 자주 만나던 내게 어느 날 선배는 '연애하자'는 문자를 보냈고 나는 '그러자'고 답장을 했다.
선배가 좋았다.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고 쌀쌀맞은 면도 있었지만 나와 있을 때는 세심하게 챙겨주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집 앞 골목길에서 따뜻하고 찐한 키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뒤부터 연락을 피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가 되고 말았다. 문자와 전화가 끊임없이 왔다.
왜 그래, 연락이 안돼. 무슨 일 있어? 걱정되니까 연락해.
사랑받는 것이 두려웠다. 첫사랑처럼 너무나도 사랑했는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을까 봐 무서웠다. 이별 통보의 원인이 (사랑 표현을 하지 못해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나일지라도 다시는 같은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연애를 시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기 전에 그 관계로부터 계속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치면서도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어, 다른 사랑을 기웃거렸다.
첫 직장에 다닐 때였다. 회사에 한 선배가 내게 너와 잘 어울릴만한 사람이 있다며 소개팅을 할 건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뭐가 어울려요?"라고 물었고, 선배는.
그 친구가 원하는 여자 스타일이 딱 너야. 결혼 생각 없고 담배 피우는 여자.
아… 그랬다. 당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결혼 생각이 전혀 없는 비혼 주의자였다. 결혼 생각은 없지만 연애에 있어서는 늘 열려 있었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 그래서 소개팅을 하기로 결정하고 전화번호를 알려주라고 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내심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연락이 없으니 좀 답답했다. 그래서 선배에게 연락처를 달라고 해 먼저 연락을 했다. 어쩌다보니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게 되었고 소개팅이 성사되었다. 약간 긴 얼굴에 까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큰 키에 말끔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나이 차가 좀 있던 나와 그 사람은 소개팅한 이후 자주 만났다. 함께 담배를 피우고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잘 맞았지만 한 가지가 맞지 않았다. 나는 술을 매우 좋아해서 거의 매일 술을 마셨고, 그 사람은 남자들 모임에서도 카페에 갈 정도로 음주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나게 되면 그가 맥주 한 병을 마실 동안 나는 여러 병을 마시고 취해 버렸다. 자주 만나긴 했지만, 특별히 대화할 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있었으나, 몇 번의 만남으로 관계는 끝이 났다.
학생 때 결혼을 한 선배를 몇 년 만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대학 때 우연히 알게 되어 종종 연락을 했던 선배를 잠시 좋아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선배에게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강한 끌림이 있었지만 결국 결혼을 축하하며 마음에서 서서히 지웠다. 그렇게 잊고 있던 선배를 우연히 만나 술을 한잔 하게 된 것이다. 술에 취해 결혼을 한 그 선배에게 '예전에 선배를 좋아했었다'며 농담 반 진담 반로 던졌는데 내 말을 들은 선배는 사뭇 진지했다. 안 그래도 아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이별을 진행하고 있던 때라 그랬는지 내 말을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다행히(?) 선배와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몇년 후 독립해 살고 있던 집 주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선배. 지하철 역에 서서 5분 정도 짧은 근황 토크가 이어졌고, 이별을 준비하던 당시 힘들어서 자주 가던 바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해서 근처에 살고 있다고 했다. 선배를 닮은 아이도 태어나 잘 지내고 있다고 웃으면서 동네 주민이니 맥주나 한잔 하자고 헤어졌다.
지금의 짝꿍을 만나기 전까지 꽤 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갔다. 짝사랑했던 사람들까지 합치면 더 많지만 3개월 이상을 넘겨 본 적이 없었고 모든 관계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도망쳤다. 사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짝꿍을 만났을 때도 같은 패턴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런데 짝꿍을 만나 명상을 시작했고 사랑한지 7년이 됐다.